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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Feb 26. 2021

피란의 해안 절경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여행 16일차: '작은 베네치아' 피란에서 여행 중단 갈림길에 서다

2019.10.07 여행 16일차 슬로베니아 류블랴나-피란

피란 마을 입구
피란 마을 입구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운이 없어서 호텔 조식을 건너뛰었다. 계속 누워 있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류블랴나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는 슬로베니아 남서쪽에 위치한 해안도시 피란이었다. 피란은 '아드리아해의 숨겨진 보석'으로 유럽인들이 자주 찾는 휴양지다. 2016년에 방영된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촬영지인 것이 알려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 여행지가 됐다. 


버스 출발 10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버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피란까지 2시간 20분을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더욱 걱정이 됐지만, 노래를 듣고 유튜브를 보면서 버텨보기로 했다. 


버스가 달린 지 한 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미칠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한 쪽 다리를 들면서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봤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버스가 중간에 정차할 때 일부 탑승객들이 하차해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계속 서 있다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편안한 좌석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피란 맛집 Pizzeria Petica
피란 맛집 Pizzeria Petica에서 먹은 SLO classic

피란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해안가를 따라 걸으니 아드리아해를 품은 작은 마을이 보였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붉은 지붕의 건물들과 새하얀 요트들이 정박한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엽서 같은 풍광을 빚어냈다. 낭만적인 항구의 경치를 눈으로 담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골목으로 대피했다. 


피란은 오랜 기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라 피자, 파스타 등 이태리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많았다. 나는 맛집을 검색해서 좁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피자집 Pizzeria Petica를 찾아갔다. 허름한 동네 피자가게 같은 분위기에서 맛집의 기운이 풍겼다. 다양한 메뉴를 살펴보다가 슬로베니아의 이름을 딴 SLO classic을 시켰다. 버섯과 햄이 주재료라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피자라서 주문했다. 피자는 1만2000원인 것 치고 크기가 엄청 컸다. 조각이 나 있지 않아서 나이프로 직접 잘라 먹었는데, 화덕에서 갓 구워낸 피자라 담백하고 맛있었다. 

타르티니 광장
타르티니 광장
피란 시청사

다 먹고 피란의 중심인 타르티니 광장으로 걸어갔다.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장난감 같고 예뻤다. 시청사 앞에는 피란 출신의 작곡가인 주세페 타르티니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작은 항구도시답게 메인 광장도 아담해서 금세 구경을 마쳤다. 


숙소 체크인 시간인 2시가 되어 파차마마 플레전트 스테이로 향했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인데 1인실이 있고, 타르티니 광장과 가까워서 예약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한 후 열쇠를 받아 3층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었더니 한 사람이 겨우 왔다갔다할 정도로 공간이 비좁았다. 게다가 문짝 아귀가 잘 맞지 않아서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직원에게 방을 교체해달라고 요청하자 문제를 확인한 직원이 더 큰 방을 안내해줬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용기 내서 이야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컨디션이 여전히 좋지 않아서 짐을 풀고 방에서 쉬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오후 5시였다. 밖에 나갈 힘이 없었지만, 먼 곳까지 와서 숙소 침대에만 있는 게 아까워 몸을 일으켰다. 우선 광장에 있는 약국에 방문해 증상을 설명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약사는 "약 잘 챙겨 먹어요. 물을 자주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라고 조언을 건넸다. 약사의 말을 듣고 곧바로 마트에 들러 물 3병을 구입했다.  

피란 맛집 Ribja Kantina
Ribja Kantina에서 시킨 오렌지 주스와 새우 리조또
Ribja Kantina에서 먹은 새우 리조또
Ribja Kantina에서 본 노을

광장을 지나 바다와 맞닿은 곳에 이르니 전망 좋은 레스토랑들이 즐비했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Ribja Kantina 선택했다. 바닷가에 왔으니 해산물 요리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새우 리조또를 주문했다. 음료로 시킨 오렌지 주스는 생 오렌지를 착즙해서 신선하고 달콤했다. 뒤이어 통통한 새우가 들어간 새우 리조또가 나왔는데, 간만에 맛있는 쌀을 먹어서 기분이 좋았다.  

피란 바닷가 풍경
피란 바닷가 풍경
타르티니 광장

저녁을 먹고 나오니 바다에 노을이 내려앉아 수평선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우는 바다 위로 돛단배 한 척이 둥둥 떠다니는 풍경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로맨틱했다. 느릿느릿 항해하는 돛단배를 보면서 '속도'보다 '꾸준함'과 '끈기'가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다가 바닷바람 때문에 추워서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숙소에 도착하자 열이 심하게 나고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차가운 바람을 계속 쐐 몸에 무리가 온 듯했다. 평소에는 감기도 잘 안 걸리는데 멀리 유럽까지 와서 아프니까 속상했다. 잠을 자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나중에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은 일정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일단 내일 상태를 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다 깨다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깊은 수면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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