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길이라 믿었던 그림을 보내주며

10년 가까이 갈망하던 드로잉, 이제야 시간이 생겼는데 재미가 없어졌다.

by leeari

"10년 가까이 갈망하던 드로잉, 이제야 시간이 생겼는데 재미가 없어졌다."


육아 4년 차.

회사도 무사히 정리했고, 아이도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다.

드디어,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 생겼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하고, 레퍼런스를 모아 드로잉을 시작했다.

딱 3일쯤 지났을까.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재미가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으니까.

이 시간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봤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즐겁게 일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그건 ‘창작’이라기보다는 제한 속에서의 기획과 도출이었다.

정해진 글자 수, 필수 소재, 금지된 워딩들.

그 틀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방향을 찾아야 했다.

놀랍게도, 그게 훨씬 더 창의적인 일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아무 제약도 없다.

정해진 예산도 없고, 요구사항도 없고, 수정을 지시하는 클라이언트도 없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그 자유로움이 오히려 나를 멈추게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향해 나아가던 몰입의 시간과, 그 속의 나 자신이었는지도.

9시간을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선 하나, 명암 하나에 집요하게 파고들던 그 몰입이 좋았던 거다.

창작이 아니라, 집중과정에 더 가까웠던 즐거움.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또 하나의 감각이 스쳤다.

나는 기획이 있는 표현,

무언가를 이해하고 구조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큰 안정감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그림체’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질문’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이 혼란이 조금 덜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늘 '그림'과 관련된 미래만을 상상해 왔는데,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겠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문은 뭘까?”

이 질문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