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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기농펑크 May 02. 2019

어쩌다 보니 리틀 포레스트

이 글은 크리킨디센터에서 발행하는 <삶의 기술>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해 협업농사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


‘회사형 인간’으로 살았던 건 작년 초가 마지막이었다. 막 이직한 나는 ‘여기는 좀 낫겠지’ 싶던 순간 다시 퇴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 회사의 구성원 대부분은 아저씨들이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폭력인지 성희롱인지도 모르는 그들은 여성동료인 내게 아무말이나 던졌고, 나는 이직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던졌다.

퇴사하며 지난 8년간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니  늘 이런 식으로 일해왔고, 이런 이유로 퇴사했다. 더이상 회사형 인간에 대해 한줌의 기대 따위 남지 않았다. 이제 이런 일상과는 작별하고 싶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농사’였다. 남을 먹이면서도 가장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농사가 참 멋지다는 생각에 대학에서는 원예도 전공했는데. 그렇다면 이참에 농사를 지어보는 건 어떨까. 의식의 흐름은 어느덧 내가 농부로 살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자는 결론으로 흘렀다.




‘펑크’ 정신으로 시작한 농사


“매번 혼자 이것저것 키워 먹어봤지만 ‘농사를 짓는다’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농사를 한번 제대로 지어보고 싶어요. 이런 저라도 괜찮다 생각하시는 함께 농사지을 분 어디 없나요?”


맙소사, 반신반의하며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을 뿐인데 그동안 관계 맺어온 많은 농부들이 응원해줬고, 지원자도 두 명이나 나타났다! 고양시에서 시민 참여형 도시농장을 운영하는 찬우물 농장 대표 이상린 농부와 당시 동작구에서 ‘어반팜테이블’이라는 자연주의 요리를 선보이던 로이든 킴 쉐프다. 우리는 로이든 킴 쉐프의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나 커피를 마시며 함께 농사를 짓자고 결의(그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난 정말 진지했다!)하고, 이상린 농부의 농장 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농사 계획을 세웠다. 이상린 농부는 워낙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농부였고, 쉐프 로이든은 그동안 농장에서 가져온 농작물로 요리하는 ‘팜 투 테이블 레스토랑’을 운영해 왔는데 이번에는 식당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순환하는 농사를 짓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거 완전 펑크잖아. 유기농펑크네.


음악 하는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회사를 또 때려친 내가 우울의 밑바닥에서 허우적 댈 줄 알았는데, 겁없이 일을 벌리는 ‘펑크 락’ 같다며 친구는 ‘유기농펑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내가 그동안 마이웨이로 농사 흉내를 내왔다는 점도DIY 정신을 지닌 ‘펑크’와 상통한다나 뭐라나.




‘차가운’ ‘도시의’ ‘유기농’


공기에 한기가 사라지고 농사가 시작될 무렵, 우리는 각자의 농장과 레스토랑, 별명의 앞 글자를 따 ‘차가운 도시의 유기농’이라 이름 짓고, 서로를 ‘차가운’, ‘도시의’, ‘유기농’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차가운은 이름과 달리 매번 자신의 농작물을 나눠주며 우리를 살찌운 마음씨 좋은 농부였고, 도시의는 어릴 적 개구쟁이 친구 같았다. 틈만 나면 놀릴거리를 찾아 나를 놀렸다는 말이다. 놀리는덴 별 이유가 없었다. 분홍색 바지를 입고 와도 놀림 받고, 특히 디자인을 중시하는 내가 농모나 작업도구를 사고 농사일에 쓰고 기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누구보다 좋아하며 놀려댔다. 차가운을 만나 세상에는 꼰대가 아닌 아저씨도 있다는 다행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도시의와 티격태격 싸우는 순간만큼은 사회에서 나를 누르던 ‘어른의 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자를 수확하던 날



마이웨이 반농반X


텃밭은 계절마다 풍성한 먹을거리를 선사했다. 심지 않아도 지천에 널려있는 미나리와 민트, 민들레, 제비꽃, 명아주는 덤이었다. 차가운은 살갑게 먹을 수 있는 풀을 구분해주며 늘 마음껏 뽑아가도 좋다고 했다. 게다가 차가운은 푸성귀도 얼마나 푸짐하게 안겨주는지. 통장은 ‘텅장’이 되어갔지만 삼시 세끼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며 최고로 호사스럽게 사는 나날이었다.

다시는 조직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나는 다행히 빠르게 이직도 할 수 있었다. 농업농촌 미디어스타트업인 ‘헬로파머’라는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는데, 구성원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 아저씨가 없다는 점이 참 좋았다. 그러면서도 1주일에 한번 농사를 지어도 좋다고 배려해 준 동료들 덕에 ‘반농반X’의 라이프 생활을 쫓으며 일로 농업과 농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파머스마켓 단짝이었던 차가운 이상린 농부


나만의 ‘반농반X’ 실험은 좋은 동료를 만나 날개를 달았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숨만 쉬어도 내는 공과금과 유지비 걱정에 불안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의욕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수확한 일부를 파머스 마켓에서 팔아보는 실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켓에 나가는 농부들의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마켓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마켓으로 벌 수 있는 수입은 늘 5만원이 넘지 않았다. 교통비나 가공비를 생각하면 마이너스 수입인 날이 더 많았고, 하나도 팔지 못하고 돌아온 날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은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마켓을 꾸준히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완두콩 풋콩 먹어봤니?


처음 맛본 완두콩 풋콩의 맛은 정말 달콤했다.


이제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새싹만 나도 감탄하는 감동의 나날이었다. 고수의 길고 가는 줄기와 잎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고수를 수확하는 날에는 빈병에 꽂아 감상하며 잘라먹곤 했다.

초여름에 딱 한번 먹을 수 있는 완두콩 풋콩은 땅콩처럼 고소하지만 촉촉하면서도, 이빨로 깨물면 단물이 나왔다. 잘 익었을때 수확해 밥이나 카레에 넣어 익혀 먹으면 포실포실 맛있는 완두콩 맛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풋콩은 내가 여태껏 알던 완두콩과 전혀 다른 그런 맛. 그맛을 처음 본 날은 일부러 친구들을 만나 풋 완두콩을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나 풀은 안 먹는다” 단호하게 거절하던 친구도 입안에 넣는 순간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달콤함이란. 쉐프인 ‘도시의’는 완두콩 어린 순도 먹는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농사 일지를 소셜 미디어에 꾸준히 올리니 우리집으로 찾아와 완두콩 스프를 만들어준 친구도 있었다.


직접수확한 바질과 한련화, 토마토로 만든 파스타


밭에서 갓 수확한 잘 익은 옥수수를 바로 쪄 먹은 그날에도 태어나서 옥수수를 처음 먹어본 것처럼 신세계가 열렸고, 전부터 꼭 먹어보고 싶었던 ‘쿠카멜론(‘멕시칸 미니오이’로도 불리며 수박 무늬에 방울토마토만한 크기를 지닌 오이)’은 내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쉽게 구해 먹을 수 없는 채소였다. 오랜만에 요리가 즐거워졌고, 더 즐거운 건 이런 것들을 친구들과 함께 나눠먹는 일이었다.




리틀 포레스트도 현실이라


여름의 텃밭은 풀과 작물이 구분되지 않는다. 풀속에 숨어있는 작물을 찾아내는 것도 일.


하지만 현실이 어디 영화 같기만 하겠나. 1년간 단편적으로 경험한 소꿉놀이였지만 농사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체감한 농사는 투입해야 하는 것이 참 많은 일이었다. 땅도 빌려야 하고(그래봐야 도시텃밭 1년 임대하는 건 농부가 짊어져야 하는 비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종자나 모종, 지지대, 그물, 퇴비, 호미 같은 농기구... 사야할 것이 참 많다. 다행히 우리는 차가운의 텃밭 15평에 농장주 차가운이 나눠주는 퇴비나 지지대 같은 얻어 쓸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도 모종을 살 때에는 계속 머릿 속에서 셈을 하며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애써야 했다.

그리고 노동력은 말해 무엇하리. 풀은 어찌나 빠르게 자라는지 아침에 농장에 도착하면 소리부터 빽 지르고 풀 베는 일을 시작했다. 유독 더웠던 작년 여름에는 차가운의 농막에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위를 먹는 나날이었다. 도시의는 그런 내 모습을 낄낄거리며 사진으로 남겼고, 더위 먹은 내 모습은 친구가 짤방(‘짤림방지용 사진’의 줄임말로, 커뮤니티에서 처음 쓰인 용어로 유머가 담긴 사진도 그렇게 불린다)으로 만들어 오랫동안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조차도 너무 웃겨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더위먹은 내 사진을 가공해 큰 웃음을 줬던 문제의 짤방


돌이켜보니 사고도 많이 쳤다. 차가운이 잘 갈아놓은 낫에 새끼 손가락을 베어 7바늘을 꿰매기도 했고 고구마 순을 자르라고 했더니 줄기를 다 잘라버려서 원래 수확할 수 있는 양의 반의 반도 구할 수 없었다.

‘어떻게 지은 농사인데.’ 분명 ‘경험’ 하겠다며 나간 마켓이었지만 본전도 못 뽑고 돌아오면 견물생심의 마음이 앞서 속이 상했다. 내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타진해 보기 위한 실험은, ‘반농반X가 아니라면 불가능’이라 결론지었다.




농사가 남긴 것들


나의 실험농사는 ebs 다큐시선 _행복의 온도_ 편에 소개되기도 했다


두꺼운 외투가 얇아지고, 사라지고 다시 옷이 점점 두꺼워지던 무렵 가진 거라곤 ‘펑크 정신’뿐인  실험농사가 끝났다. 전적으로 함께 농사지었기 때문에, 도움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이들을 만나 함께 농사짓기 전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만큼 꼭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거나 요구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농사’를 모르고 체력도 없는 나는 전적으로 동료들에게 의지하는 일이 많았다. 농사일이 익숙한 차가운과 손으로 일하는 것이 직업인 도시의가 주머니 가득 농산물을 수확하면 나는 고작 한줌 정도 수확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농산물은 늘 한데 모아 똑같이 나눴다.


점심을 먹거나 새참을 먹을 때면 사람 좋은 차가운 곁에 늘 새로운 멤버가 붙었다. 차가운의 친구들은 도무지 빈손으로 오는 적이 없었다. 분명 사람은 하난데 열 사람 먹을 만큼의 반찬과 간식을 챙겨왔다. 차가운의 친구들은 우리를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었다. 지나가다 막걸리를 건네주고 갔고, 귀한 노지 딸기라든지, 수확물 중 가장 튼실하고 맛있는 것도 기꺼이 나눠줬다. 오가며 만나며 아무말이나 하는 게 아닌 정답게 안부를 나눴고, ‘애쓴다’, ‘힘내라’는 응원도 꼭 덧붙였다.

신선한 먹거리를 먹으며 몸만 건강해진 건 아니다. 고향이 아닌 도시에 노동자로 이주해 제대로 된 소속감 없이 살았던 나는 비로소 고립되었다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들에게 신세 지고, 때로는 투닥 투닥 싸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산다는 건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뜨겁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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