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늘 라디오를 들었다.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다른 친구들보다 한 시간 더 했다. 열 시에 학생들이 집에 가고 나면 나처럼 한 시간 더 공부하는 자습실 사람들만 남았다. 내 자리는 창가였지만 자습 책상이 창문을 다 가렸다. 빼꼼 보이는 창문에는 달 대신 허연 형광등이 비쳤다.
열 한 시에 자습실 불을 끄면 온 학교가 컴컴해졌다. 학교를 비추는 건 가로등 대 여섯 개 뿐. 주변에 있는 게 산과 논두렁뿐인 학교의 가로등은 온갖 벌레들을 끌어들였다. 우리는 가로등을 피해 인조잔디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피곤한 다리에 힘이 풀려 우리는 휘청휘청 걸었다. 운동장이 어두워 발 밑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눈을 크게 뜨고 발 밑을 살펴도 감은 눈 속을 들여다보듯 어두웠다. 우리는 가로등이 비추는 정문으로, 밝은 빛을 향해 걸었다.
정문 밖에서는 차들이 기다렸다. 부모님들은 발 밑이 어두울까 헤드라이트도 켜고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셨다.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아서 비 오는 날에는 어떤 차가 우리 집 차인지 안 보였다. 우리 집 차를 안타고 지나치면 옆에서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엄마일 때도 있었고, 아빠일 때도 있었다. 엄마가 나오는 날에는 아빠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거나 잠을 못이긴 날이었고, 아빠가 나오는 날에는 엄마가 저녁상 같은 간식상을 차리고 기다리셨다.
차를 타면 라디오가 나왔다. MBC 표준 라디오가 그 때는 102.5mhz였다. 그 많고 많은 라디오 주파수 중, 산골짜기에서 잡히는 주파수는 MBC 표준뿐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설마 그거 하나뿐이었겠어?’ 싶지만, 내가 가진 라디오(정말 라디오 기능만 있는 라디오)에서 잡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차에서는 더 많은 주파수가 잡혔겠지만 우리 집 차에서는 언제나 MBC 표준만 틀었다. 차를 타면 엄마(가끔씩 아빠)랑 둘만 있는데도 복작복작하니 좋았다.
우리 집은 학교와 멀지 않아서 [별이 빛나는 밤에] 3부 첫 곡 후, 게스트가 DJ가 인사와 안부를 나누면 도착이었다. 가끔씩 노래 전에 퀴즈를 낼 때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주차를 하고 나서도 정답을 듣기 위해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면 DJ가 읽어줬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선물도 받았다. 우리 지역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지역 DJ가 진행했는데, 그래서 더 라디오가 가깝게 느껴졌다. 지역 대학생들이 게스트로 나오는 날, 나이로 놀림을 받으면 DJ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늙어서 말 못할 때까지 별밤 할 건데?”
집에 올라가면 엄마가 차려준 간식(거의 밥이었다.)을 먹고 잤다. 여기서 ‘잤다’함은, 다른 학생들처럼 잔다고 들어가서 딴짓 하는 일을 말한다. PMP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닌텐도를 했다. 쳇바퀴 속 유일한 낙이었다. ‘포켓몬스터 펄기아’ 게임 속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심심타파] DJ는 신동 김신영에서 신동 박규리로, 다시 신동으로 바뀌었다. TV보다 라디오를 더 많이 들을 때라 신동의 얼굴보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신동은 가끔씩 초대 손님이 오면 만담하듯 라디오를 진행했다. 식당 옆 자리 아저씨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기분이 들어 게임보다 라디오에 집중하곤 했다. 싸이가 초대 손님으로 왔을 때에는 노래를 ‘Right now’ 밖에 틀어주지 않았는데, 다른 곡을 소개할 것처럼 말해 놓고 같은 곡만 부르는 싸이의 뚝심에 그 노래를 다운받고 말았다.
요일별 코너도 자주 바뀌었다. 추대엽이 나와서 원곡을 바꿔 부르는 코너가 제일 좋았다. 윤종신의 ‘본능적으로’를 ‘선릉역으로’로 바꿔 부른 곡은 아직도 흥얼거리고 있다. 그 때에는 DJ인 신동 보다도 추대엽을 좋아했기 때문에 코너가 없어졌을 때 정말 서운했다. 다른 코너들도 좋았지만, 기억나는 건 그 코너뿐이다. 추대엽이 나오는 날에는 코너를 전부 듣고 싶었다. 하지만 2시까지 하는 라디오를 듣기에 몸이 너무 피곤했다. 게임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곤 했다. PMP와 닌텐도를 못 숨겨놓고 잔 날에는 다음날 나를 깨우러 들어온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다녀오면 밤은 라디오에 파묻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몽글몽글한 노랫소리에 묻혀 둥실둥실 잠들었다. 시원한 가을밤 냄새와 폭신한 이불, 딸깍거리는 닌텐도 버튼 소리가 떠오르는 시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라디오와 멀어졌다. ‘집에 오가는 시간을 줄이고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를 댔지만, 친구들과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공부도 했다. 다만 친구와 공부 이외에는 뒷전이었다. 그래봤자 고등학생이지만 대단한 것이 된 것 마냥, 되어야 하는 것 마냥 굴던 고3였다. 덕분에 무언가 되기는 했지만.
수능 직전, 기숙사에서 짐을 조금씩 빼서 집에 가져다 두기로 했다. 책가방에 책 대신 옷가지를 채우고 엄마가 기다릴 정문으로 향했다. 엄마도 그대로, 차도 그대로인데 라디오는 바뀌어 있었다. 지역 방송 DJ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신, 서울 라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그 DJ가 천년 만년 DJ 할거랬는데?”
“그 DJ는 천년 만년 DJ 할 것 같았는데.”
엄마와 나는 비슷한 말을 했다. 서울 [별이 빛나는 밤에]는 내 문자를 읽어주지 않았다. 그 때 까지도 나는 라디오에 문자를 보내면 전부 읽어주는 줄 알았는데.
내가 기숙사에 들어간 사이 방은 창고가 되어 있었다. 매주 주말 집에 올 때 마다 짐이 늘었다. 차곡차곡 쌓여 침대와 그 옆 한 뼘만 남은 수면실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에 가면 방을 창고로 쓸 거라고 했다. 서운할 새도 없이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기숙사에 가져온 몇 안되는 물건 중 하나는 닌텐도였지만, 안 쓰던 닌텐도는 방전으로 고장이 났다. 결국 펄기아를 잡지 못하고 게임을 그만뒀다. 어느새 라디오를 듣던 PMP는 스마트폰보다 작아져 있었다. PMP는 어딘가 구석에 처박혔다. PMP가 아니더라도 라디오를 들을 다른 방법이 많았다. 그렇다고 라디오를 듣지는 않았다. [심심타파] DJ가 바뀌어 있었다. 옛날처럼 정이 붙지 않았다. PMP도 닌텐도도 없는 밤, 대학생이 된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잠들었다. 옛날과는 다르고 지금과 같다.
이제 다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일찍 자는 삶의 반복이다. 밤에 늦게 잔다고 잔소리할 엄마도, 시험 성적에 들들 볶을 선생님도 없다. 전보다 자유로운 규칙 속에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다만 그 때 같은 간질간질함은 없다. 닌텐도 불빛이 엄마한테 들킬까 싶어 숨막힐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살짝 숨구멍을 텄을 때의 해방감. 그게 없다. 닌텐도로 하던 게임을 스마트폰으로 다시 해봤다. 그 때만큼의 의욕이 없다. 졸음을 못 이겨 자던 때랑은 다르다. 졸음을 기다리다가 잠든다. 잠은 밤에 온다는 약속을 미루고 미뤘다가 아침에야 찾아왔다. 어깨가 뻐근한 게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잠이 얹혀서 인지 모를 그런 낮이 가면 똑 같은 밤이 오고.
꼭 일찍 잠들었어야 했던 밤, 새벽까지 잠 못 들어 꼼지락 대다가 라디오를 찾았다. 아무 기능 없는 라디오. 연식이 오래됐는지 사용법을 검색하는 일도 한참 걸렸다.
가사가 ‘낮은 마음으로 살아야 해.’ 였나, 라디오를 켜자 ‘9와 숫자들’의 노래가 나왔다. 영상도 없고 진동도 없이 구멍 뚫린 스피커에서 소리만 흘러나왔다. 잔잔한 노래에 잔잔한 새벽. 그 때의 간질거림은 없지만 적어도 기분은 싱숭생숭했다. 그 때의 새벽 냄새가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