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성 친구를 대하는 자세

좋아하는 사람과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by Albert 이홍규

[본문의 내용은 창작입니다.]


Scene 1

대학교 1학년, 가을, 도서관, 새벽 1시


fw-00652rS.jpg 〈왓 이프〉(2013) [출처: Seventh Row]


니콜: 자, 월러스, 서로에 대해 더 알아보는 건 어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난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동성 결혼이나, 낙태가 옳은 건지, 남자랑 여자가 정말 친구로 지낼 수 있는지라던가, 아니면 너 솔직히 언젠가는 챈트리와 자고 싶은 건지 같은 문제들 말이야.
월러스: 관심은 고맙지만, 챈트리는 사귀고 있는 남자 있어.

〈왓 이프〉(2013)


새벽 1시, 도서관에서 노트북에 열심히 에세이를 쓰고 있던 J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개인적인 호불호를 밝혔다. “나는 여자 입장에서 제일 싫어하는 영화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야. 솔직히 그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 다 변태 같아.”


여기는 J와 나, 둘 뿐이니 아마 내게 대화를 (아니, 시비를) 걸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아직 써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이 남아서 딱히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의지 표명이었기에 기지개를 펴고 “아아아”, J를 바라보고 반론을 펼쳤다.


“그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든 영화인데… 친구, 연인, 섹스에 대해서 그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도 없어.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거든. 아니, 아예 그 이후에 나온 모든 같은 장르의 영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아류에 불과하다 생각해. 아니, 그보다 변태 이야기는 도대체 왜?”


J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나도 그녀의 덫에 걸렸다. 순간 오늘 과제는 망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J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결국 그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 잖아.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평범하게 친구로 잘 지내는 모든 남녀관계에 불필요한 텐션이 생긴 거라 생각해. 그 영화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주위 이성 친구들을 일종의 연애 발전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보는 거 아냐? 봐, 우리도 이성 친구로 잘 지내잖아.”

“같은 영화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해리랑 샐리가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거지.”

“글쎄, 백보 양보해서 메시지가 그거라고 해줄게. 그 영화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과연 그 선을 긋고 살아갈까? 나도 해리고, 친구로만 지내왔던 그녀가 샐리일 수도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 아냐? 그래서 일종의 남성 판타지라고 생각해. 여자는 생각도 없는데 많은 남성들에게 아 어쩌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같은.”

“그건 반대로도 가능하지 않아? 남자는 생각도 없는데 여자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상황. 그런 면에서는 여성 판타지가 될 수도 있지.”


J는 한숨을 쉬었다.“네가 이렇게 여자를 모르니까 연애를 못하는 거야. 친구로서 책임이 크다 생각한다. 여자는 절대로 친구로 선을 긋고 지내온 남자에게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아. 만약 친구로 오랫동안 지내왔는데 연애를 하는 케이스가 주위에 보이면 그건 여자가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 상대일 뿐이야.”


“남자도 똑같아. 연인으로 발전할 수 없는 친구들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너도 그렇지 않은 거 알잖아. 남자는 정말 아예 아무 생각이 없었던 이성 친구에게도 연애감정이 생길 수 있어. 여자는 절대 안 그래.”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너 이 주제에 대해서 굉장히 단정적이다?”


“자, 봐. 나는 그 영화 캐스팅도 그러한 면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여주인공은 한 시대의 전설적인 미녀인 멕 라이언인데, 남주인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지나가는 남자 1에 어울리는 마스크를 가진 빌리 크리스털이야. 만약 남자 주인공이 톰 크루즈, 아니, 그 정도 미남도 아니라 톰 행크스처럼 훈남만 되었어도 여자도 공감이 가능한 영화였을 걸? 왜냐면 항상 매력을 느꼈던 상대니까 서로 만날 듯 못 만날 듯하다가 어느 순간 이뤄지는 순간의 여주인공 심리 상태가 설명이 되거든.”

“그 영화 주인공이 빌리 크리스털이 아니라 톰 크루즈였으면 그냥 또 다른 미남 미녀 로맨스 영화가 되는 거 아닐까?”

“그게 내 말이야. 평범하게 생긴 해리도 최고의 미인인 샐리와 계속 친구로 알고 살아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는 남성 판타지 영화라는 거지.”


묘하게 설득당했다. “아, 살짝 짜증 나네. 나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그냥 순수하게 감상하고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좋아하는 거야?”

“모든 취향이 잠재의식의 발현인 건 아니야. 그냥 영화의 색감이나, 대사가, 주인공들의 연기가 좋아서 일 수도 있지.”


J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추리닝 차림에 머리를 묶고 쌩얼로 나온 J를 보니 이 친구가 나를 얼마나 이성으로 신경 쓰지 않는지 새삼스레 환기가 된다. 갑자기 그녀에게 묻고 싶어 졌다. “그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너는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처음부터 이성적인 호감이 없었으면 친구로 계속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


“응. 당연한 거 아냐? 괜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같은 영화 보고 남자 쪽에서 뜬금없이 대시만 안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해.”

“너무 그 영화에 집착하는데, 어쩌면 이 세상 모든 해리가 고백을 해도 된다고 느끼게 만드는 샐리들도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일종의 미필적 고의야.”

“아냐. 그건 성범죄를 줄이려면 미니스커트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랑 똑같아. 나는 평소대로 행동하는 건데 왜 그게 이성적인 관심으로 오해받아야 하지?”


잠깐 충격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J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지만 아까 말했듯이 그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 남자가 빌리 크리스털에 감정 이입해서 좋아하지는 않아. 네 논리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단순히 어떠한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좋아할 뿐인데, 왜 그 사실 때문에 이성친구에게 고백해서 멀쩡한 친구 관계를 망칠 수도 있는 남자로 오해받아야 해?”


J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영화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다 변태 같다는 말은 취소. 그래도 나는 그 영화 싫어해.”


“너처럼 생각하는 남자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런데 진짜 여자는 오래 알게 되면 좋아하는 경우가 없어?”

“없어. 그런데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남자가 맹렬하게 대시하면 사귀는 경우는 있어.”

“그거는 또 왜?”

“혹시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엔가 있는데 아직 못 찾았을까 봐.”

“…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지?”

“아닌데. 진짜야.”

“그거랑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가 생기는 거랑 뭐가 다른 건데?”

“아! 하나 있다. 여자가 절대 사귀지 않는 남자.”

“어떤 남자?”


J는 배시시 웃었다. “논리로 무조건 이겨야 하는 남자.”


아, 나는 도대체 왜 사귀지도 않는 여자와의 말싸움에도 지는 거지.


자기 나름대로 토론에서 이긴 J는 다시 과제로 돌아갔다. 나 또한 노트북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새벽이라 살짝 졸려서 그런지, 눈은 노트북을 보고 있었지만 의도치 않았던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너는 나중에는 내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내가 무슨 말을 한 걸까. 가슴이 살짝 두근거려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니?


Scene 2

대학교 2학년, 겨울, 홍대 근처 실내 포장마차, 밤 12시


MCDWHHA_EC025.jpg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출처: GQ]


해리: 여자랑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런데 만약 둘 다 각각 연애를 하고 있다면 다른 이야기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이론에 대한 예외 조항이라고 생각해. 각각 다른 연애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된다면 혹시나 모를 연애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어지지… 아니야, 그것도 안돼. 왜냐면 각각의 연애 파트너는 왜 이성 친구가 필요한지에 대해 이해를 못하거든. 연애에 부족한 것이 있는 건지, 왜 그걸 연애 밖에서 찾는지. 그리고 ‘아니야, 아니야, 연애에 부족한 건 없어,’라고 말해도, 연애 파트너는 네가 혹시나 이성 친구에게 연애 감정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거든. 아마 실제로도 그럴 거고. 아니, 장난쳐? 당연히 그렇지. 결국 예외조항 전에 있던 기존의 이론에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여자랑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분명히 처음에는 여럿이서 모여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 명씩 두 명씩 사라지고 J와 둘만 남게 되었다. J는 신나서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벌인 애정행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화장실 앞에서 둘이 키씋 했다니까.”

“거짓말.”

“진짜야- 심지어 나랑 눈도 마주쳤는데 신경도 안 쓰고 계속 키씋 했어.”

“걔네는 내일 아침에 서로 얼굴 어떻게 보냐… 정말 술이 원수다.”

“무슨 술이 원수야. 술이 빌미였던 거지. 술에게 감사해야 해. 원래 둘이 서로 좋아했었는데 둘 다 씽글이었던 적이 없는 거야. 아마 내일부터 사귈걸?”

“응? 너는 둘이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어?”

“응. 우리는 다 알고 있었어.”

“우리?”

“여자애들.”

“여자들은 어떻게 그런 걸 알지? 우리들은 아예 몰랐는데. 남자애는 본인도 몰랐을걸?”

“여자는 씩쓰쎈쓰으가 있어.”


J는 취하면 영어 발음을 살짝 오버해서 말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거슬리지는 않았다. 어떤 단어에는 (키씋처럼) 비음과 바람소리가 섞여 살짝 두근거릴 때도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나는 시선을 테이블로 돌려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진짜 남자랑 여자는 친구로 지내기가 어렵네.”


J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왜? 친구로 잘 지낼 수 있어.”


“굳이 왜 이성이랑 친구로 지내지? 어차피 결혼하지도 않을 테고, 각각 결혼하면 바로 남남 아니야?”

“왜 결혼하면 남남이어야 하는데?”

“나는 나중에 결혼한 다음에 내 와이프가 이성친구랑 둘이 만난다고 나가면 기분 나쁠 것 같아. 나도 이성친구랑 둘이 만나지도 않을 거고.”

“왜? 둘이 어떻게 이어질까 봐?”

“그런 건 아니지만… 보기 안 좋잖아.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결혼해서 남편이나 부인 있는 사람이 이성 친구랑 둘이 만나고 있는 게. 너는 결혼한 너 남편이 다른 여자랑 둘이 저녁 먹고 들어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


J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마 나도 싫을 거야. 근데 그러한 광경을 싫어하는 나도 싫어. 안 좋게 보는 컬쳫 자체도 이상하고. 이성인 두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성적 호감 없이 살아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나는 그러한 사회적 관념 자체가, 개개인 모두, 남자든 여자든, 무의식 중에 이성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고, 남녀 간의 이성친구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겼다 생각해.”

“결혼한 상대방을 그렇게까지 믿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프지 않아?”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런 걸 하지 말자고 하는 약속 아닐까? 앞으로는 쓸데없이 이성친구와 만나서 시간 보내지 말고 한 이성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거지.”

“그 쓸데없는 이성친구라는 말이 이상하잖아. 세상의 반은 이성인데, 왜 그중 반이나 평생 친구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야 해?”

“계속 똑같은 말로 돌아가는데,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보면 나오잖아. 이성 간의 친구는 존재하지 못한다니까.”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그 영화의 메시지는 남자, 여자 간의 친구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해뤼샐맇는 친구로 남기 불가능한 커플이었다고.”

“글쎄, 너는 주위에 남자, 여자 둘이서 아무 일없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사이 봤어?”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넘어간다. “우리 친구로 잘 지내고 있잖아.”


“우리가 친구로 지내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언젠가는 그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서로 무의식 중에 즐겨서 그런 거 아냐?”


“어머.” J는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젠장.


“아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가 너한테 고백하는 건 아…”

“야, 더 말하지 마.”

“미안해.”


테이블이 잠시 조용해졌다. 어느새 작은 실내 포장마차에는 우리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상당히 큰데도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다 이상하게 나올 듯하다.


“아- 이만 일어날까?”

“그래.”


왜 J 앞에서는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바보 같아지고, 의미가 뒤틀리는지 모르겠다.


다르게 이야기했어도 이렇게 끝났을까.


Scene 3

졸업식 다음날, 봄, 집 근처 카페, 오후 3시


cast-of-10-things-i-hate-about-you-1-1551969174.jpg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 [출처: ELLE]


캣: 네가 나한테 말하는 방식이 싫어. 니 머리스타일도. 내 차 운전하는 방법도 싫고. 날 빤히 바라볼 때도 싫어. 네 바보같이 커다란 워커 부츠도 싫고, 내 생각을 읽는 것도 싫어. 네가 너무 싫어서 뱃속이 울렁거려. 항상 맞는 말을 하는 너도 싫어. 거짓말할 때도 싫어. 네가 나를 웃길 때도 싫고 날 울게 만들 때는 더 싫어. 주위에 없을 때도 싫고, 전화 안 할 때도 싫어. 하지만 가장 싫은 건 너를 싫어하지 않는 나야. 조금도, 하나도, 아예 싫어하지 않는 내가.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


J는 상당히 피곤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졸업 축하해!”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어떻게 지내?”

“그냥… 나 벌써 회사 들어간 지 1년 됐어. 맨날 야근해.”

“부럽다. 난 이제 졸업했는데.”

“남자는 군대 다녀오잖아.”

“응 그렇지. 부모님은 잘 계셔?”

“응. 너희 부모님은?”

“여전하시지.”


이게 아닌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기지개를 한번 켜고 무심하게, 아니, 무심한 척 물어보았다. “그래서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고?”


“…응.”


“와 축하해!” 앉은 지 3분 되었는데 벌써 일어나고 싶다.


“고마워.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선배야.”

“오, 사내연애네.”

“응, 어쩌다 보니까. 비밀로 만나고 있어… 너는? 지난번에 만나던 친구는?”

“아, 헤어진 지 좀 됐어.”

“정말? 우리 마지막에 봤을 때는 완전 평생 만날 것 같더니만.”

“그랬나? 그다음 얼마 안 있다가 헤어졌어.”


J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때, 한참 친했을 때 저 표정이 정말 신경 쓰였던 기분이 기억난다. 그녀가 대화 중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거슬려서 몇 번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물어온다. “어쩌다가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


“음-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내가 좋아하지 않았어. 그게 미안해서.”

“안타깝다… 그런 기분은 어떻게 알게 되는 거야?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의 비대칭?”

“내가 알아차린 건 아니고… 그 친구가 알아차렸어.”

“네가 자기를 덜 좋아한다는 사실을?”

“으응. 그런 말을 하면서 자기는 이렇게 더 이상 못 사귀겠다고 해서… 나도 그러면 어쩔 수 없다고 했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너는 처음부터 왜 사귀었는데?”


“… 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왜 내 연애관에 항상 시비야?”


웃으면서 장난으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짜증이 섞여 나왔다. 왜 이 아이만 보면 감정 컨트롤이 안될까. 왜 네 앞에 있는 내 모습은 항상 찐따 같을까.


“미안해.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나도 요즘에 연애가 조금 힘들어서 그냥 투정 부린 거야.”


좋다. 아니, 싫다. 왜 이런 하찮은 힌트에 순식간에 내 기분이 바뀌는 걸까.


“그 회사 선배랑?”

“응… 처음에는 같은 회사에서 비밀로 연애하는 게 스릴 있고 재미있었는데…”

“재미있었는데?”

“하루 종일 회사에서 보고, 퇴근하고도 또 보니까… 뭔가 나만의 삶이 없는 것 같아서.”

“으응… 사내 비밀 연애가 힘들긴 하다더라.”

“그러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렇게 심해?”

“응, 너무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뭐 하나 숨길 수도 없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사귀는 사이에 숨겨야 하는 게 있어?”

“당연하지. 어휴, 정말 남자들은 그걸 모르더라. 예를 들어 옷을 사러 가는 거나, 화장품 사러 가는 거, 네일 받는 거.”

“그런 일들은 보통 같이 하지 않아?”

“같이 할 때도 있지만 혼자서 하고 싶을 때도 있어. 예쁜 옷 사서 짜잔하고 나타나고 싶을 때도 있고… 내가 돈 쓰는 모든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왜 남자들은 여자가 뭘 숨기면 다른 남자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혹시 남자들은 여자친구한테 뭐하는지 이야기 안 해주는 모든 시간에 다른 여자 만나?”


잠깐 멍해진다. 여기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지금 J의 남자친구를 변호해주는 기분이고, 그렇다고 대답하면 나는 거짓말하고 다른 여자 만난 적 있다고 대답하는 꼴이다. 아니, 그 전에 분명히 대화의 방향이 이쪽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J는 대학 때부터 이런 날카롭고 곤란한 질문을 곧잘 하고는 했는데,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다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기분에 벌떡 깨고는 했다.


“글쎄다. 나는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녀는 입술을 샐쭉 내밀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이런 기분 너무 싫다.”

“어떤 기분?”


네가 너무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나도 빙글빙글 돌려가며 대답해서 대화가 산으로 가는 기분?


“연애라는 게 서로가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기분. 왜 희생하면서까지 둘이 붙어있어야 하는 거지? 너무 좋아서 둘만 서로 좋아하자고 만나고 있는데, 왜 누가 더 희생하고 있는지 따져야 하지? 그냥, 희생하지 않고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 같은 연애는 할 수 없는 걸까?”

“너는 친구 관계에 희생이 없다고 생각해?”

“보통 친구 관계에 희생이 따르지는 않잖아? 친구를 위해서 내 모습을 바꾸거나 내 생활 패턴을 바꾸지는 않았던 것 같아. 친구는 그냥 친구로 받아들여주지.”

“그건 네 입장이고, 너를 위해서 친구들이 희생하고 있었을 수도 있어.”


J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정말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어쩌지 싶어서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다행히 그녀가 먼저 구겨진 표정을 풀고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호로록.


“치. 너 예전부터 은근히 상처 주는 말 잘하더라.”

“나처럼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남자… 아니, 친구가 정말 소중한 거야.”

“으이구 퍽 고맙기도 하네요.”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흐른다. 잠시 봄의 카페에서 으레 느낄 수 있는 푸근함에 젖어 어른이 되기를 몇 분 정도 거부한 우리 둘은 서로가 아닌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좀 자주 보자.”

“그러게. 이렇게 만나니까 좋으다-”


너는 좋으냐. 나는 아프다.


Scene 4

서른 되기 며칠 전, 겨울, 강남역 근처 바, 새벽 1시


WI-00256-1024x681.jpg 〈왓 이프〉(2013) [출처: WeAreMovieGeeks]


월러스: 너는 모든 여자와의 관계를 섹스 때문에 망치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어른이거든.
엘런: 네가 진심으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참 귀여워.

〈왓 이프〉(2013)


“그만 마셔. 너 취했어.”

“왜 그래! 나 내일부터 드디어 자유란 말이야!”


J가 이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 본다. 나도 똑같이 마셨는데 왜 이렇게 멀쩡 하지.


“비행기가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수요일.”

“그래도 대단하다. 7년을 다닌 회사를 하루아침에 때려치우고 반년 간 유럽 여행이라니. 부럽네.”

“부러우면 너도 회사 그만두고 나랑 같이 가자.”


얘는 왜 이렇게 가슴 두근거릴 만한 이야기를 쉽게 할까. 10년 가까이 보며 J에게는 완전히 없어진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런 기분이 올라와도 잘 다스릴 자신이 있다.


“됐다. 나 얼마나 어렵게 취업했는지 너도 알잖아.”

“힝.”


원래 J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거나 하지 않았는데 유난히 오늘따라 홍당무다. 내가 내 잔에 술을 따르려니 J가 내 손을 붙잡는다.


쎌픟 하지 마!”

“우리가 안지 얼마나 오래되었는데 무슨 자작 가지고.”


살짝 힘을 주어 손을 뿌리친 후 술을 다 따라서 한잔 마셨다. J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잠시 음악을 들으며 제목이 뭐였는지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J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등을 꽃꽂이 세웠다.


“아 맞다.”

“응?”

“너 대학교 1학년 때 나한테 도서관에서 고백 비슷하게 했던 거 기억나?”


아마 무언가 마시고 있었으면 뿜었을 것 같다. 만화에서 보면 뿜는 연출이 웃기지만, 한 번도 실제로 그래 본 적은 없는데, 목이 턱 막혀오자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지 않아 역류하는 것이 어떠한 기분인지 순식간에 이해됐다.


“무슨 말이야.”

“우리 왜 영화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나 ‘해뤼샐맇를 만났을 때’ 싫어한다고.”

“그랬었나.”

“응. 그때 나 헤드폰 끼고 있었는데 네가 나 좋아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잖아.”

“아니야. 내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다 생각하냐 물어봤지.”

“기억하네.”


말문이 막혔다. 내가 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취기를 댐처럼 막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울렁거리면서 술이 확 올라왔다. 심지어 목 끝에서 신맛이 느껴진다. 오히려 J는 술이 깼는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들은 참 나빠.”

“뭐가?”

“왜 제대로 고백도 안 하고. 제대로 친구로 지켜 주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야.”

“우리 진짜 이 이야기할 거야?”

“왜 하면 안 돼?”

“너 취했어. 이런 이야기 하고 나 계속 볼 자신 있어?”

“너는 이런 이야기 안 하고 앞으로도 나 볼 자신 있어?”


눈 앞이 살짝 하얘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말을 한다기 보다는, 목소리가 기어 나온다.


“너 지금 나한테 뭐하는 거야? 왜 그래?”

“솔직히 우리 둘 관계,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너에게 어떤 말을 하기를 바라니?”

“대답! 대답을 해! 내가 묻는 질문에 한 번이라도 똑바로 진심으로 대답해줘!”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큰 소리에 깜짝 놀라서 우리를 쳐다본다. 다시 정신이 똑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해보자. 너도 알고 있었네. 내가 너 좋아했던 거. 내가 감정 표현할 때마다 모른 척했던 건 오히려 너 아냐?”

“네가 언제 나한테 제대로 우리 사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꼭 말로 다 해야지 알아?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거가 그런 거 아냐?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알아온 두 사람이 어느새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걸 언제 하려고 한 거야? 지금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내서 하는 거 아냐? 왜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상대방에게 미루니?”

“책임 전가하지 마. 나는 내 감정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하고, 대답을 돌려주지 않은 건 너야.”


입을 열고 말은 나오는데, 도대체 이 대화가 어떻게 끝날지, 오늘 이후로 어떻게 될지가 너무 혼란스럽다. J의 눈가는 살짝 촉촉해져 있었다. 속이 내려앉는다.


“너 진짜 밉다.”

“너는 왜 다음 주에 유럽 간다는 애가 나한테 이러냐. 너무 이기적이야. 어차피 가버릴 거 아냐?”

“이거 봐. 자기는 대답은 모두 회피하고, 나한테만 입장을 명확하게 하기를 강요하잖아. 우리는 만약에 연애해도 진짜 행복해지기 힘들 것 같아.”


한때는 거의 매일 집에 돌아와 침대에 혼자 누우면 J와의 연애는 어떨까에 대해 상상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시다가 고백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J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내 교회 친구와 소개를 시켜준 적도 있다. 유럽 여행을 간다 했을 때도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그녀가 대견스러웠고 딱히 내 곁에서 한동안 없어질 거라는 사실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떠나보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왜 그녀 입에서 우리는 연애해도 행복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자 화가 치밀고 가슴이 먹먹한 건지. 테이블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대답… 네가 이미 했네. 우리 사귀면 불행할 거라고.”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 말에 놀라서 J를 바라보았는데 마주친 그녀의 시선에는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있었다. J는 한숨을 쉬면서 일어났다. 냅킨으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더니 그녀는 핸드백을 걸쳤다.


“됐다. 그만 하자.”

“우리 사귀지도 않았는데 벌써 헤어진 거야?”

“미치겠다. 이 상황이 웃기니, 너는?”

“집에 데려다줄게.”

“관둬. 나 갔다 와서 봐.”


나도 벌떡 일어섰다. 왠지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따라 나가야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은 했는데, 갑자기 10년간의 피로가 몰려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각, 또각, 그녀가 나가는 힐 소리가 귓가에 박혀왔다.


우리는 더 가까워졌을까, 더 멀어졌을까.


Scene 5

6개월 후, 여름, 인천공항, 초저녁


1387142582000-jump-2HER.jpg 〈그녀〉(2013) [출처: USA Today]


에이미: 그녀를 사랑해?
시어도어: 만약 그렇다면 나 정신병자 같아?
에이미: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사랑에 빠지는 모든 사람은 정신병자야. 미친 짓이잖아. 사랑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정신 이상 증세야.

〈그녀〉(2013)


문이 열리고, 오버사이즈 선글라스를 끼고 캐리어를 밀고 나오는 J가 보였다. 내 쪽을 보더니 놀란 척해주는 건지, 실제로 놀란 건지 알쏭달쏭한 입모양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어머, 진짜 데리러 왔네?”

“너 엄청 탔다.”

“건강해 보이지 않아?”

“응, 좋아 보여. 얼른 가자, 피곤할 텐데.”


나는 그녀에게 캐리어를 받아서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J는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타고 서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할 말이 굉장히 많을 줄 알았는데, 굉장히 조용했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하는 거지?


“문 열리는데 네가 어떤 외국 남자랑 같이 나올까 봐 살짝 긴장했어.”


아이고 화상아, 멘트 하고는, 하이고, 못났다. 어쩌냐, 나. 구질구질해서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니. 운전 중 그녀의 얼굴을 살짝 훔쳐봤는데 까만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 정확히 어떠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

“음… 프랑스. 토요일 오전의 센 강이 참 좋더라. 왠지 드라마에서 보거나 주위에서 들으면 센 강 산책했다느니 그런 말이 허세처럼 느껴졌는데, 정말로 그곳에 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강변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독서하게 돼.”

“말만 들어도 부러워 죽겠네.”

“응, 그리고 스위스도 좋았어. 알프스도 참 예쁘고.”

“나도 스위스는 정말 가보고 싶어.”


J는 한 호흡 쉬고 질문을 나에게 돌렸다.


“너는 잘 지냈어?”

“응. 엄청 커다란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서 오래간만에 칼퇴 가능한 달이라 요즘은 학원 다니면서 중국어 공부 중이야.”

“열심히 사네. 멋지다, 내 친구.”


모두가 쓰는 단어인데, 왜 그녀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면 몸이 경직되는지 모르겠다. 재치 넘치는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다시 정적이 흘렀다.


“너 없는 사이에…”

“읔.”

“뭐가?”

“여기서는 그 이야기하지 말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지 애매하다. 이 여자는 왜 수수께끼로 대화를 하는지. 답답하다. 양쪽 턱관절이 뻐근하다. J는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자서 너무 피곤해. 너한테 어떤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고. 나도 6개월간 생각 많이 했는데, 지금 여기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 여기서 이야기 시작하면 왠지 모르겠는데 고속도로 한복판에 내리고 싶을 것 같아.”

“그래, 알았다.”


아니, 솔직히 한 개도 모르겠다. 혹시 벌써 마음을 정리했다는 뜻일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내 얼굴에 내 생각이 쓰여 있나? 아니면 조금 전에 내 머릿속의 생각이 무의식 중에 실제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나? 혹시 평생 주위 사람들이 내가 상처받을까 이야기 안 해줬지만, 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틱이 있나? 여름이라 해가 늦게 지고 있어서 J는 턱을 괸 채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도대체 저 선글라스 아래서 J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10년을 알아온 이 친구와도 이렇게 소통이 어려운데, 남자와 여자는 같은 종의 동물이기는 한 걸까?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동물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어둑해졌고, 차는 그녀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 왔…”


조수석을 돌아보자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깨우기가 망설여진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시동을 끄고 나도 운전대에 턱을 괴고 잠시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의 감각이 창 틈으로 스며들어오는 한여름 밤의 매미 소리와 쌕쌕거리는 그녀의 숨소리만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깨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으음- 언제 도착한 거야?”

“지금 막.”

“고마워, 정말 수고했어.”


그녀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벗고 나와 눈을 맞췄다. 어두운 차 안이지만 J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차에서 내려서 그녀의 캐리어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내려서 바로 말해야지라고 후보로 뽑아 두었던 모든 재치 있는 말들이 머리 속에서, 마치 백사장 위에 써놓은 글씨가 파도에 쓸리듯 사라졌다.


찰나의 머뭇거림이 우리가 알고 지낸 지난 10년보다 길게 느껴질 때쯤, J가 입을 열었다.


“잠깐 올라… 올래?”


(끝)


[영화 대사는 정식 자막과는 상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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