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좋았었는데 잊어도 괜찮은 걸까

서울시립도서관 연애 기억 보관소 제3관

by Albert 이홍규

[본문의 내용은 창작입니다.]


1. 2016년 11월 10일. "회원님, 연애 기억의 반환이 1개월 체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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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 위이이잉. 모르는 번호였다.


모처럼 일이 없는 토요일 오후, 집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었던 나연은 휴대폰 화면을 보고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유나연 회원님 되시나요?"

"네, 맞는데요."

"아- 회원님 반갑습니다, 서울시립도서관 연애 기억 보관소 3관입니다. 회원님께서 대여하신 2014년 8월의 기억이 반환 기한 1개월 체납이 되어서 연락드립니다."

"아..."


나연은 전화기를 놓지 않고 작은 원룸을 둘러보았다. 시선은 TV 스탠드 옆에 뽀얗게 먼지가 앉은 테이프 케이스위에 앉았다. 케이스에는 "유나연: 2014년 2월 21일"이라고 싸인펜을 꾹꾹 눌러쓴 레이블이 보인다.


"깜빡했어요. 체납료가 얼마죠?"

"반환일로부터 45일까지는 2천2백 원이십니다, 회원님."

"네, 얼른 반납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원님."


나연은 전화를 끊고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대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되었는데, 아직 한 번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연애 기억 테이프는 왠지 그녀를 도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왔다.


테이프를 밀어 넣고 재생을 누른 나연은 방의 불을 끄고, 무릎을 끌어안고, 방 한가운데에 앉아 기억이 재생되길 기다렸다.


'우리 어떡하지?'


TV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나연은 생각보다 참을 만하다는 생각을 하며, 홀짝,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2. 2014년 2월 21일. "우리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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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떡하지?"


나연은 라테 위 하트 모양 거품을 바라보다가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아있는 성준을 바라보았다. 화두를 던진 성준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응?"


성준은 어느새 자신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모두 마신 상태였다. 정말, 5천 원짜리 음료수를 10초 만에 마시다니,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남자가 아닌가 싶다. 1초에 500원. 성준은 빨대로 얼음을 휘젓다가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호로로로로록. 마치 목 한가운데 무언가 걸려있는 듯한 표정의 성준은 바닥을 드러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의미 없이 계속 빨아댔다.


"아 맞다. 자기야, 나 저번에 말했던 과외 학생 있잖아. 지연이. 지연이 어머니가 요번에 대학 붙은 거 고맙다고 저녁 사주신다는데."

"... 나연아."

"응?"

"우리말이야."

"응."

"그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갑자기 라테 향이 역하게 느껴져 나연은 예쁜 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왜?"

"음. 오랫동안 만났는데...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원하는데?"

"우리가 더 오래 사귀어도. 나연이 너와 결혼하는 그림이 상상이 안돼."


목이 콱막혀오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지만 나연은 애써 웃었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감싸고 있는 성준의 손을 잡았다.


"자기 요즘 취업 때문에 힘들어서 그래. 내가 요즘에 좀 많이 징징 거렸지? 미안해."

"나연아."

"자기라고 불러줘. 왜 요즘에 이름으로 불러?"

"나연아."

"미안해. 응? 나도 요즘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 내가 잘 할게. 그러지 마."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런데 나 정말 더 이상 더 할 수 있는 용기가 안나."

"우리 이런 거 몇 번 이겨왔잖아. 이번에는 내가 자기 지켜줄게. 응?"


나연은 눈앞의 시선이 뿌옇게 흐려지며, 시선이 수십 갈래로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내려왔다. 성준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고는 그녀의 시선으로 눈을 피하며 일어섰다.


"미안해."

"가지 마."

"안녕."


성준은 뒤를 돌아서 그녀에게 멀어졌다.


꼴사납게,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프랜차이즈 커피숍 한가운데서 울어버렸다.


3. 2016년 11월 12일. "곧 기억 보관이 만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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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 만에 찾아온 도서관은 한산했다. 길이 가물가물했지만, 왠지 로비의 안내원에게 연애 기억 보관소로 가는 길을 물어보기가 민망했던 나연은 혼자 씩씩하게 꼬불꼬불한 복도로 들어갔다가 괜히 10분 동안 어두운 통로를 돌아서 다시 로비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연애 기억 보관소... 어느 쪽인가요?"

"연애 기억 보관소 말씀 이신가요?"


일부러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봤는데 안내원은 일부러 약 올리는 듯 큰 목소리로 복명했다. 로비에 앉아서 노닥거리던 커플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네..."

"저 쪽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4층으로 올라가셔서 엘리베이터 문 왼쪽으로 쭉 직진하시면 있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좋은 하루가 될 리가 있겠니. 나연은 한숨을 쉬고 왠지 오늘따라 도서관 간다고 화장도 거의 안 하고 나온 본인을 탓하며 보관소로 걸음을 옮겼다. 보관소로 향하는 도는 왠지 불이 나간 전구도 많아 스산한 분위기였다.


서울시립도서관 연애 기억 보관소 제3관.


복도 끝, 마치 들어오지 말라고 시위하는 듯이 무거워 보이는 철문 위에 오래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레이블이 간신히 붙어있었다. 나연은 힘겹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긴 데스크 너머로 넓은 철제 랙이 펼쳐져 있다. 데스크에는 사서 한 명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대기자가 없어 나연은 에코백에서 테이프 케이스를 꺼내 데스크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안경을 쓴 여자 사서는 왠지 어렸을 때 피아노를 가르친 과외 선생님처럼 무섭게 생겨서 체납한 자신을 혼낼 것 같았다.


"저, 연애 기억 반납하러 왔는데요."

"네. 회원님 이름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

"XX 4월 16일, 유나연이요... 아 그런데 저 한 달 체납되었어요."


먼저 얘기하면 왠지 덜 혼날 것 같아서 그녀는 최대한 빨리 죄를 고하였다. 사서는 빙그레 웃고는 안경을 올려 쓰고는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테이프를 잡아당겼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서는 독수리타법으로 시끄러운 키보드를 탁탁 쳐댔다.


"유... 나연 회원님. 네. 여기 있네요. 체납료는 2천3백 원입니다."


그녀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옆에 있던 조그마한 플라스틱 케이스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네."


나연은 미리 준비해둔 천 원짜리 지폐 두장과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플라스틱 케이스 위에 올려놓았다. 사서는 케이스 위의 지폐와 동전을 세고는 다시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두들겼다.


"... 6년 11월 13일, 반납 완료. 네, 반납 확인되었습니다."


나연은 왠지 긴장해서 어깨에 걸친 에코백 끈을 양손으로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뒤를 돌아 이 엄숙한 공간을 어서 벗어나려던 나연의 등을 향해 사서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회원님."

"네?"

"여기 보니, 연애 기억 중 대부분이 12월 보관 만기로 되어 있는데요. 혹시 보관 연장 요청하고 싶으신가요?"

"네? 만기요?"

"네, 12월에 만기입니다. 연장을 요청하시는 기억에 한해서 다시 1년 연장을 해드립니다. 따로 연장을 요청을 안 하시면 만기일 후에 기억은 자동 파기되세요."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면, 리스트 중에 원하시는 기억만 집어서 연장 요청을 할 수 있으세요."

"리스트요?"

"네, 잠시만요."


그녀는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고, 잠시 후 뒤쪽에 위치한, 모양마저도 공무원스러운 잉크젯 프린터가 '위잉 칙 위잉 척' 하는 소리와 함께 A4용지 세장을 토해냈다. 사서에게 용지를 건네받은 그녀는 날짜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날짜 옆에 오른쪽에 네모 상자 보이시죠? 거기서 지우고 싶은 기억은 여기 볼펜으로 체크를 하시면 되세요. 나머지는 자동 연장 신청해드릴게요."

"저..."

"네?"

"이거 무슨 기억인지 이렇게 날짜만 봐서는 잘 모르는데... 열람도 가능한가요?"


왠지 눈꼬리를 올리고 안된다고 할 것 같았지만 사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스트 저 주시면 가져올게요."


나연은 사서에게 종이를 건넸고 사서는 종이를 받아 들고는 넓은 철재 랙 사이로 사라졌다. 나연은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옆의 의자에도 앉지 못하고 보관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곰팡내가 날 것 같은 인테리어였지만, 가을의 마지막 날, 창문 너머로 따뜻한 햇빛이 보관소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나연은 햇빛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았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사서는 낑낑거리며 커다란 네모 바구니 하나를 들고 카운터 위에 올렸다. 네모 바구니 속에는 족히 봐도 수십 개는 될 듯한 테이프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그리고는 나연에게 키를 하나 건넸다.


"저기 옆 쪽문에 들어가시면 열람실이 A부터 D까지 있으세요. 열람실 C를 사용하시면 되세요."

"아, 감사합니다."


나연은 키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급하고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무겁네요."

"연애를 오래 하셔서 그래요."

"아..."


문으로 다가가던 나연은 문득 궁금해져 뒤를 돌아보고는 사서에게 물어봤다.


"혹시 연애 상대방은 어떤 기억을 파기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연애 상대방의 개인정보는 일절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사서는 다시 눈을 모니터로 옮겨 예의 독수리 타법으로 무언가를 탁탁탁 치기 시작했다.


열람실은 딱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고, 철제 책상 위에 오래되어 보이는 일체형 모니터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나연은 문을 잠그고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는, 가장 위에 있던 기억 테이프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4. 2015년 12월 18일. "요즘 나한테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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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때 뭐하지?"

"글쎄..."


성준은 나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책을 읽고 있었다. 성준의 자취방은 좁아서 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였고, 때문에 한 사람이 기분이 나빠지면 다른 사람은 그 미묘한 숨소리 변화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구조였다.


성준은 책에 꽤 빠져있었는지 나연이 씩씩거리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왜 그래?"

"자기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한테 화난 게 도대체 뭐야?"

"... 무슨 소리야, 또."

"이브 때 뭐하냐고 물어봤잖아."


성준은 한숨을 쉬었다. 나연은 그 한숨소리가 듣기 싫었다.


"또 한숨 쉰다. 내가 그거 싫다고 했지."

"미안해. 조금 생각이 많아서 그랬어. 우리 이브 때 뭐할까? 하고 싶은 거 있어?"

"... 하."


정말로 화가 잔뜩 나면 눈 앞이 하얘지는구나.


"하고 싶은 거 있어?"

"싸울래? 됐어. 아 귀찮으면 만나지 마. 나도 그냥 친구들이랑 클럽 갈게."

"뭐라고?"

"됐다고. 자기 기분 나쁜데 왜 굳이 만나."


나연은 옆에 놓아두었던 백을 챙기고 일어섰다.


"유나연. 앉아."

"뭘 앉아."

"내가 그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그래?"

"무슨 말."

"클럽 간다며."

"아니, 네가 나 만나기 싫은 것 같아서 그러지. 정말 만난 지 오래되긴 했나 보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너한테 이브 때 뭐할까 물어보는 게 뭐가 잘못된 건데?"

"그게 왜 잘못되었는지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우리 하루 이틀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아, 진짜 너랑 이런 얘기 하기 싫어."

"나연아, 요즘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야."


나연은 휘돌아서 걸어나갔다.


"유나연."


성준은 이름을 불렀지만 일어나서 쫓아오지 않았다. 나연은 성준이 쫓아 나오지 않는 것에 더 어이가 없어져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왠지, 이번 싸움은 오래갈 것 같았다.



... 파기. 아, 이 기억은 진짜 파기다. 나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네모 박스에 빨간색 펜을 꾹 눌러가며 체크했다.


5. 2015년 10월 31일. "강아지는 항상 푸시업 하고 있는데 안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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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럽게 떠서 성준의 입으로 가져갔다.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던 성준은 웃으면서 입을 벌려 마치 아기새처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연은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먹은 후 카페 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가을이라서 그런지 일찍 어두워진 밖은 헐벗은 여자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 추울까?"

"응?"

"쟤네들."


성준은 나연이 가리키는 창밖을 바라보고는 야한 간호사, 야한 경찰, 야한 프렌치 메이드 복장을 한껏 꾸며 입은 할로윈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러게. 아오, 보기만 해도 춥다."

"저러고 싶을까?"

"자기야."

"응?"


성준의 입가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자기도 작년에 저렇게 입고 나랑 파티 갔잖아."

"아, 그건 일 년 전이고!"

"오구구 그 사이에 철드신 거야?"

"응."


나연은 마지막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성준의 입에 떠먹여 주고는 활짝 웃었다. 성준은 손을 뻗어 나연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미안해, 올해는 할로윈에 같이 못 놀아서."

"아니야. 자기 다음 주가 자격증 시험인데 무슨 할로윈이야."


16년 상반기 취업을 노리고 있는 성준은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 중이었다. 나연은 뭔가 생각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이조부 다이조부."

"그건 일본어."

"아 그러네."


성준은 그녀를 보면 따뜻하게 웃었고 나연은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는 성준의 손을 잡아서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자기 취업하고 나서 내년 할로윈에 놀면 돼요."

"철들었다며. 추워 보인 다며."

"내 철은 업 앤 다운 이 있어. 원래 겨울 지나가면 또 봄 오고 그러잖아."

"그게 뭐야."


성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빼고는 다시 공부를 하던 중국어 교재로 눈을 옮겼다. 나연은 그런 성준을 보고는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코스춤을 입지 않은 아저씨 한 명이, 꺅꺅 거리는 헐벗은 여자들 사이로 커다란 강아지를 데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 골든 리트리버."

"응?"


나연 못지않게 강아지를 좋아하는 성준도 나연을 따라 밖을 바라봤고 웃음을 띄었다.


"귀엽다."

"응."


골든 리트리버는 나이가 조금 들었는지 차분하게 자신을 만지는 손길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성준은 넋을 놓고 기품 있는 표정으로 헥헥거리는 골든을 보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강아지는 항상 푸시업 하고 있는데 안 힘들까?"

"응?"

"봐, 푸시업 하고 있잖아."

"하하하하 그게 뭐야!"

"걸어 다닐 때마다 푸시업 해야 하니까 근육은 빨리 생기겠다, 그렇지?"

"자기 바보 같아."


둘은 하염없이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연장.


6. 2015년 7월 4일. "따뜻한 네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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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은 눈을 반짝 떴다. 옆에서 색색거리는 성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연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어보고는 속옷만 입고 있는 둘의 몸을 확인한 후 소리 없이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깊은 잠에 빠져있는 성준을 깨울 용기가 들지 않았기에 나연은 베개 옆의 휴대폰을 더듬어 찾았다. 충전을 깜빡하고 자서 배터리가 32%밖에 남지 않았고, 카카오톡에는 110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제일 친한 친구인 지희의 메시지를 먼저 확인했다.


'야 어떻게 됐어?'

'뭐야 뭐야 자는 거?’

'일어나자마자 바로 문자해.'


나연은 일단 답변을 미뤄두고, 107개 메시지가 와 있는 단체 카톡방을 확인했다. 회사 부서 사람들끼리의 실없는 농담이 대부분이었다. 지희에게 뭐라고 답변할까 하다가 '성공적.'이라고 보내고 다시 휴대폰을 끄고는 침대 옆의 스탠드 위에 올려놓았다.


벌써 한여름이라, 방 안에서 텁텁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4시간 정도밖에 못 잤지만 왠지 잠이 모두 달아나 버린 나연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첫 경험은 아니었지만, 왠지 성준과는 사귄 후에 오랫동안 기다려 와서, 느낌이 생소했다.


지난밤을 생각하며 왠지 부끄러워진 나연은 이불을 살짝 걷고는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찾아서 입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 컵에 따라 마셨다. 온몸으로 수분이 뻗어 나가며 머리가 띵-해졌다.


물컵을 가지고 침대로 와서 성준의 옆에 앉아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칼로 손을 옮겨 쓸어 올렸다. 성준의 이마는 기름기 때문에 번들거렸지만 왠지 더럽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의 기름기를 티셔츠에 스윽 닦고나서, 머리를 몇 번 쓸어 올리자 성준이 눈을 떴다. 나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응."


성준은 몸을 일으켜서 나연의 손에 들려있는 물컵을 받아 목을 축였다. 그는 울대뼈를 꿀렁거리며 정말 맛있게 물을 마시고는 기분좋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잘 잤어?"

"응. 자기는?"


나연은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그런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그의 몸은 굉장히 뜨거웠다. 나연은 몸의 무게를 성준에게 맡긴 채 잠시 둘의 체온을 비교해 보았다. 성준은 나연의 손을 잡고는 살짝 찬 것을 보고 자신의 허벅지에 가져댔다.


"손이 왜 이렇게 차?"


당연히 찬물 들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마음이 따뜻해서 그래."


성준은 피식 웃고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규칙적이었던 성준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나연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는 머릿속에 들어오는 대로 지껄였다.


"자기 몸, 따뜻해서 좋다."


성준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둘은 씻지도 않은 채 다시 하나가 되었고, 성준은 그녀의 귀에 속삭여왔다.


"나도 따뜻한 자기가 좋아."



파기. 파기. 파기.


7. 2015년 6월 12일. "우리가 오래 사귀려면 서로 믿음이 있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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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은 한 줌이나 나온 성준의 입이 오늘따라 참 미워 보였다. 동갑인데 왜 성준이 더 어리게 느껴지는 건지. 정말 같은 나이라도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정신연령이 조금씩 낮다는 소문을 믿고 싶어진다.


"내가 친구들이랑 부산 가는 게 그렇게 싫어? 여자끼리 간다니까?"

"자기는 내가 내 친구들이랑 2박 3일로 부산 간다고 하면 신나겠어?"

"아니, 내가 가서 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 부산 갈 때마다 뭐했길래? 그렇게 나를 못 믿어?"


성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아니잖아. 나는 자기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들을 못 믿는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

"내가 무슨 갓난아기도 아니고. 나도 자기 만나기 전에 잘 살아왔어. 내 몸 지킬 줄 알아."

"아 진짜, 말 한번."


답답한 나머지 자신이 좀 말을 심하게 하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여기서 지면 안될 것 같았다. 성준은 참 바르게 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너가 좋은 남자 친구였지만, 그만큼 보수적이기도 했다. 나연이 회사에서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본인이 데리러 오던가, 아니면 새벽까지도 나연의 자취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 일수였다.


왠지 오늘만큼은 남자 친구와 담판을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 나연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자기야. 우리가 오래 사귀려면 서로 믿음이 있어야 돼."

"아, 나는 너 믿어. 그 말이 아니래도."

"우리가 반년 사귀면서 내가 자기한테 못 믿을만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니?"

"그게 아니라..."


아휴 저 다문 입. 어떻게 저렇게 잘 생긴 얼굴을 가지고 저렇게 못 생기게 쓰는 걸까. 나연은 성준의 팔에 손을 올렸다.


"내가 내려가서 두 시간에 한 번씩 카톡 할게. 아니, 한 시간에 한 번씩 할까?"

"그러니까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너무 매력적이니까 그렇지.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보이는 거야."


예쁜 말을 참 못나게 한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나연은 꾹 참고 성준의 팔을 흔들었다.


"자기야, 말은 고마워. 그런데, 응?"

"자기는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걸 보이는데도 꼭 부산에 가야겠어? 나랑 함께 있으면서 즐거우면 안 돼?"

"당연히 너랑 있는 게 좋지. 그런데 나도 친구들이 있잖아. 그리고 이건 정말 오랫동안 약속한 거란 말이야."

"나도 너랑 만나느라 내 친구들 자주 못 봐."


나연은 순간 뒷골이 당겨왔다. 오늘은 꽤 오래 싸울 것 같다.



파기.


8. 2015년 4월 8일. "뭐가 그렇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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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느껴지는 성준의 온기를 느끼며 나연은 한강을 바라보았다. 완연한 봄의 저녁은 아직 서늘했지만 야경에 이끌리는 수많은 연인들을 막지 못했다. 그들의 뒤쪽으로 자전거들이 슝슝하고 지나갔다. 나연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자기야."

"응."

"나한테 사귀자고 하기 전에 얼마나 좋아했어?"

"또 물어봐?"

"듣는 거 좋단 말이야."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자마자 반했지. 거의 일 년 동안 좋아했던 것 같아."

"치, 그 사이에 여자 친구도 있었으면서."


성준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등으로 느껴졌다.


"딱 두 달이었다니까. 그리고 걔가 바람 폈다고 했잖아."

"알아."


나연은 문득 생각이 나서 이어폰을 꺼내 한쪽을 성준에게 내밀고는 다른 한쪽을 자신의 귀에 꼽았다.


"맞다, 나 이 노래 오늘 찾았는데 너무 좋아."


나연은 휴대폰을 꺼내서는 노래를 틀었다. 청량한 통기타 소리가 한쪽 귀로부터 들려왔다. 주위에는 모두 자신들처럼 몸을 겹치고 있는 연인들뿐이지만, 왠지 나연은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가장 특별하다고. 얘네들은 아마 일찍 헤어지겠지만, 우리는 정말 특별하게 만났고, 정말 오랫동안 사귈 것이라고.


성준이 나연을 백허그하고 있었기에,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왠지 나연은 성준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연은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다 좋아."



... 연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지고 있다가 금방 파기해야지.


9. 2015년 1월 19일. "제가 누군지 어떻게 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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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작은 카페에 앉아있었다. 나연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성준이 살짝 무서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지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아, 네."

"그런데,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요?"

"... 네."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연은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어디서 뵈었죠?"

"아마 기억 못 하실 거예요. 한 1년 전에 지희랑 나연 씨가 같이 걸어가는데 제가 지희 알아보고 인사했거든요."

"아... 어디서요?"

"신촌이요."

"그걸 기억하세요?"


성준의 얼굴이 빨개졌다.


"네."

"우와 대단하시다."

"나연 씨가... 너무 미인이라서. 계속 기억하고 있었네요."


으악 돌직구다. 나 이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하. 하. 감사드려요."

"네... 그래서 좀 앓다가 지희한테 부탁했어요. 그때 같이 봤던 분 소개하여 달라고."

"아... 그렇구나. 그런데 제가 어떤 사람일지 어떻게 알고요?"

"인상이 좋으시고 제 타입이어서..."


남자가 이렇게 밀당을 못하면 왠지 할 말이 없어진다. 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준에게 물었다.


"성준 씨는 작년에 막 복학하셨다고 하셨죠?"

"네. 나연 씨는 올해 회사 신입이시라고..."

"하하 지희가 얘기를 많이 해줬나 봐요."

"네."

"네, 저 올해 첫 회사 들어가서 많이 정신이 없어요."


성준은 알아들었을까.


"그러시구나... 나연 씨는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못 알아들었나 보다.


"저는... 영화 보는 거 좋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요리하려고 해요."

"아. 저도 영화 좋아해요."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성준의 눈이 반짝였다.


"호러 영화 빼고 거의 다 좋아하는데... 사실 50년대부터 7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을 좋아해요. 고다르나 트뤼포 같은 감독들 영화. 물론 고전 할리우드 영화도 엄청 좋아해요. 스티브 맥퀸 광팬이고요."


어색해하던 성준이 막 떠들기 시작하자 나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스티브 맥퀸의 대탈주를 찬양하기 시작하던 성준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말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는지 합하고 입을 닫았다.


"아, 죄송해요. 제가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주책이 없어지네요."

"... 저도 고다르 좋아해요."

"아 고다르를 아세요?"

"네. 프랑스 여배우들을 참 예쁘게 찍는 것 같아요. 〈네 멋대로 해라〉도 정말 좋아하고."


성준은 환하게 웃었다. 나연은 기대했던 것보다 그의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성준은 나연이 보아온 또래 남자들 중, 가장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연에게 물어왔다.


"언제 영화같이 보러 갈까요?"

"... 네, 좋아요."



파기.


10. 2016년 11월 12일. "파기, 확실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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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연은 바구니와 리스트를 들고 열람실을 나왔다. 오후 5시가 막 지나고 있었지만 초겨울인지라 이미 밖에서 비춰오던 햇빛은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진 보관소는 스산했다. 영차하고 카운터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은 나연은 사서에게 리스트를 건넸다.


"여기요."

"네."


사서는 나연이 건네준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 읽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나연은 왠지 초조해져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거랑 그 거 두 개 빼고 나머지 다 파기해 주세요."

"네."


사서는 리스트의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날짜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컴퓨터의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탁. 탁. 탁. 탁. 아마 스페이스바를 치는 아이템 전산에서도 삭제되는 걸까 싶다. 모든 아이템을 확인한 사서는 다시 한번 문서와 모니터를 비교해 보았다. 확실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옆에 있는 용지 하나를 꺼냈다.


"파기, 확실하시죠?"

"... 네."

"거기에 사인해주시면 되세요."

"기억, 파기하면 어떻게 돼요?"

"네?"

"어떤 식으로 파기해요?"

"테이프 자체를 부수죠."

"혹시 나중에 고쳐서 볼 수도 있어요?"


사서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아..."

"회원님, 혹시 확실하지 않다면 연장하시겠어요?"

"..."


나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 꽉꽉 막혀왔지만 그래도, 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파기해 주세요. 아, 그리고 2015년 4월 8일 테이프는 대여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모니터에서 몇 번을 클릭한 사서는 나연에게 테이프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연이 뒤를 돌려고 했을 때 사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억 테이프를 자주 보시다 보면 점점 색이 바래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흑백영화처럼 돼요."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나연은 눈물이 나오는 것을 꾹 참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어둑한 통로, 시끄럽고 오래된 엘리베이터, 로비에서 아직도 시시덕 거리고 있는 커플... 아 근데 쟤네 도대체 뭐니 하루 종일 여기 있었던 거야? 나연은 들어온 길을 반대로 나가며 꾹 꾹 참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참아야 됐다.


계단 위에서 옷소매로 흐려진 눈을 살짝 닦고는 계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성준은 바구니 가득 테이프를 담긴 테이프를 미처 감추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꾹 꾹 참았는데.


(끝)


맺는말. 글의 내용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오마쥬입니다.


[이미지 출처: FILMGR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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