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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Feb 07. 2021

[서평]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움베르토 에코

이해를 거부하는 가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가치

새해가 시작되고,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타 팀 동료분과 식사를 하다 으레껏 연말 연휴를 어떻게 보냈는지 질문했다. 그는 넷플릭스에 "벽난로"라고 검색하면 올라오는 1시간 길이의 동영상을 틀어놓고 장작이 타는 영상을 TV로 보면서 조용히 보냈다 대답했다.


바로 웃었다. 그의 대답이 판데믹 시대, 크리스마스와 한해 말일, 그리고 신정이라는 가장 즐거워야 할 연휴에, 일일 천명의 확진자 발생에, 5명 이상이면 가족이라도 모이지 못하는 촌극을 풍자와 함께 표현한 재치 있는 과장법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몹시 훌륭한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하며 써먹고 싶어 메모를 했다.


당황스럽게도 동료는 진심이었다. 넷플릭스에 "벽난로" 검색을 하니 타오르는 장작을 찍은 두세 개의 영상이 결과로 출력되었다 (영상들은 신기하게도 며칠 후 넷플릭스에서 사라졌고, 글을 쓰는 지금도 검색 결과에는 없어서, 혹시 대화 자체를 꿈꾼 것인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평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영감의 영혼을 자처하며 살아가기에, 업무용 정보 검색 용도 외에는 유튜브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바라보는 장소에서는 굳이 청개구리처럼 하늘과 천장을 바라보며 기지개 켜는 습관이 있다. 때문에 TV로 장작이 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주말, 책을 읽다가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문득 "벽난로 영상" 생각이 떠올라, 유튜브에서 장작 타는 영상 하나를 검색해 TV로 재생하고는 올드 패션드 칵테일을 만들어 와서 책을 다시 폈다. 스크린 속 불꽃을 시야 언저리에 둔 채로,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스피커에서 스며 나오는 장작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약 200페이지를 읽었다.


마치 엠씨스퀘어를 처음 접한 중학생처럼, 이러한 집중력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지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평소 유튜브의 사용 시간과 집중력/주의력을 반비례의 관계로 생각했었고, 유튜버의 영상을 본다거나, ASMR을 시청한다는 개념을 몹시 민망하고, 닭살스럽게 받아들여왔었기에 더욱 놀랐다.


그 이후, 책을 읽고 싶을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벽난로 영상을 틀었다. 기왕 고백한 것, 더욱 깊은 이야기를 하자면, 수많은 장작 영상 중 가장 효과가 좋은 영상도 엄선했다. 심지어 힘든 일이 있던 날은, 퇴근하자마자 올드 패션드를 만들어 와서는, TV를 틀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태어나 드라마 한 편 본방사수한 적이 없는데, TV 화면에서 타오르는, 강박에 가까운 이유로 재생한 0과 1로 이루어진 화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하의 밤, 히터도 틀지 않았는데 따뜻함을 느끼면서, 2021년, 판데믹-거리두기 시대의 원효대사 해골 난로를 체험할 수 있었다.


원효대사 해골 난로 [출처: https://youtu.be/AWKzr6n0ea0]


물론 내 결정으로 직접 재생하는 영상이지만, 굳이 파블로프의 개라는 비유를 사용한 이유는, 이제 나에게 "벽난로 영상"과 독서는 완전히 연결된 행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퇴근을 하고는,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신간 에세이집을 골라, 사명감과 함께 "벽난로 영상"을 재생했고, 앉은자리에서 320페이지를 끝낼 수 있었다. 몹시 뿌듯한 경험이었고, 이 영광을 "벽난로 영상"에게 돌리고 싶었다. 한편, 평론은 대상이 되는 작품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하찮은 지론 아래, 이런 형태 외 서평을 시작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은사의 마지막 가르침

움베르토 에코 [출처: Giovanna Silva]


책을 소개하기 전 어쭙잖은 재치랍시고 과장을 했다. 그렇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유작",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을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신간 에세이집"이라고 묘사를 마쳤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 평가 기준 안에서는, 『돈키호테』를 "재치 있는 기사도 비틀기"라고 설명하는 행위와 그 축약의 정도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움베르토 에코는 지난 15년간, 내게 문학이 선사할 수 있는 희열의 수준을 정의한, 한 번도 뵌 적 없는 은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지금 나를 흥분시키는 문학의 모든 주제- 중세 역사, 미술, 기호학, 신학은 그가 『장미의 이름』과 『바우돌리노』를 통해 일깨워 주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움베르토 에코는 제1차와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파시즘이 국가를 전복하고, 패전 국가에서 다시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모국이 국수주의에 물드는 상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중세 미학과 기호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부터는 본인의 전공분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설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들이 번역되고 각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오르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이윤기 작가의 빼어난 번역을 통해 (중역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골수팬들을 양성했다. 개인적으로 북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영미권과 대한민국의 출판시장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는데, 움베르토 에코라는 작가에 한해서는 한국의 번역 퀄리티 및, 작품 출판 기동력이 영미권을 상회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20대 후반, 대한민국에 돌아온 나에게, 영미권에도 존재하지 않는 움베르토 에코 전집이 출판되는 이 나라에서, 도대체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 건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방황하게 만들다 독서모임을 가입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은사'님께서 2016년 타계한 후 (공인의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내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2000년대 이후, 문학계와 예술계 전반을 사로잡았던 도덕적 해이라는 망령에서 그가 자유로웠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그는 일련의 지표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처음 에코에 흠뻑 빠진 계기는 그의 소설과 문학적 상상력 때문이었지만, 오히려 에세이집을 통해 배워나간 그는 "완성형 인간"으로 다가왔다. 물론 에코 본인은 나를 비롯한 대중이 그를 어떠한 영웅적 프레임에 가둔다는 상황을 몹시 부담스러워했으리라.


그렇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에코의 에세이집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에코는 문학과 학술 양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잡지 『레스프레소(l'Espresso)』에 수십 년 간 「미네르바 성냥갑(La bustina di minerva)」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왔다. 그는 이 지면을 통해, 그의 주 활동영역인 역사에 대한 해석과 편집에서 담기 힘든 현대에 대한 독특하고 기발한 시선을 소개해 왔다.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은 그가 2000년부터 2016년 작고 전까지 기고한 55편의 에세이를 모아 출간한 작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 독자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석학의 시선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에코가 미디어, 인터넷, 스마트폰 등이 가져온 정보의 홍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도래한 "유동 사회(Liquid Society)"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였는지 읽어가다 보니, 문득 은사의 마지막 수업을 청강하는 느낌을 받았다.


유동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미친 세상을…』을 통해, 에코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본인이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정보의 범람 전, 우리가 과거, 즉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현재에 관한 뉴스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해석하면서, 모든 일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인터넷에서는 알아야 하는 일과 알 필요가 없는 일들이 중첩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서 허구와 실제의 구분을 하는 작업이 힘들어진다고 평한다.


하지만 정보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역사가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는 말은 유려한 수사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옛날 옛날에 처칠이 살았다」를 통해, 영국인의 4분의 1일 처칠을 허구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설문 조사 결과를 소개한다. 현대인과 역사 간 괴리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은퇴를 앞둔 고등학교 역사 선생의 넋두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한편으로는 그 괴리가 벌어진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한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는 일이다.


부시가 19세기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잘 알고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소련이 초기 탈레반과 벌인 최근의 전쟁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아프가니스탄 원정을 다르게 기획했을 것이다.


역사는 한편, 관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에코는 「신은 안다, 내가 바보라는 걸」을 통해, 동료 작가이자, 레돈다라는 마이크로네이션의 국왕으로도 유명한 하비에르 마리아스와 가졌던 대화를 소개하고, 신의 부재와 관심병 사이의 연결성을 찾는다.


신은 모르는 것이 없고, 날카롭고 정의로운 눈으로 김 빠지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삶에도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서 인간들에 의해 거듭 소환된다.


이러한 전시안(All-Seeing Eye)이 사라지는 순간, 남는 것은 사회와 타인의 눈이다. 즉, 중세를 넘어 근대의 초반까지 인간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던 신이 없어지자, 인간은 그를 대체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단언해줄 또 다른 시선을 갈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코는 우리가 신에게 받고 있다고 느꼈고, 그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알아주기(이해)"이지, "알아봐주기(인식)"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칼럼은 아마 「시인들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에코는 나니 발레스트리니라는 이탈리아의 원로 시인이 시집이 사라져 가는 출판 시장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자유롭게 시를 발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대체제를 찾았다는 논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다만 발레스트리니는 너무 많은 플랫폼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중 믿을만한 주소 몇 개를 거론했다.


이 인터뷰를 접한 이들은, 아직도 좋은 시는 출판이 되고 있으며, 오히려 잡지, 페스티벌, 낭송회 등 독자와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늘어났고, 한편 인터넷에 존재하는 (블로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플랫폼들은 "노출증 환자들의 전시물"과 "잡담 수준의 시"만을 게시하고 있다고 반론했다.


에코는 어린 시절, 주간지를 통해 접한 아마추어 시인들의 작품과 편집자의 평을 함께 게재했던 문예란을 떠올리며, 작품을 좋은 의도나 감정이 아니라 문체로 평가하라는 좋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회상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코가 말하고 있는 것은 창작은 기본적으로 평론과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개념이며, 이를 깨우치는 것은 창작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당시에도 수많은 문예 잡지들 사이 옥석 구분이 존재했고, 유년 시절의 에코도 어렴풋이 그러한 개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인터넷에서도 동일한 개념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문학 관련 페스티벌이나 잡지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맞는다면 좀 더 진지한 시인과 독자들이 인터넷상에서도 좀 더 믿을 만한 웹 사이트로 안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글쓰기와 글 읽기라는 행위를 진지하게 대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다분히 낭만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희와 쾌락을 접하는 방법이 다각화되면서, 어떤 (나를 포함한) 고리타분한 이들은 기술의 발전과 문학에 대한 관심은 반비례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소통의 속도를 위해 비문과 축약어로만 이루어진 대화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누가 <전쟁과 평화>을 읽으며 피에르와 안드레이, 나타샤의 몰락과 구원이 온전한 속도로 성사되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에코는 「아름다운 필체에 대한 단상」에서 몰락해가는 문화인 캘리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이 PC와 스마트컴퓨터 때문에 젊은이들이 맞춤법을 자주 틀리고, 축약어를 많이 사용하며, 손글씨를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적어도 에코의 경험 상으로는, 필체에 대한 강박과 맞춤법은 큰 관계가 없으며, 필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은 키보드의 도래 이전, 볼펜이 만년필을 대체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축약어의 경우, 이미 키케로가 쓰던 라틴어는 중세 신학자 대에 와서는 사투리에 가까운 변형을 겪었으며, 현대 이탈리아어는 당연히 그 변형이 더욱 심하다. 결국, 사회적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현상을 가지고 기술의 발전을 탓하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는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사이 진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스포츠나 예술적인 즐거움의 형태로 되찾아 오는 법을 배웠다.


문득 다시 눈을 들어, 장작이 타오르는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혼자 식사하는 상황이 싫어 먹방을 틀어놓고 먹고, 잠이 오지 않아 ASMR을 틀어놓고 침대에 눕고, 자신이 훨씬 잘 이해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인 게임방송을 보는 이들의 심리와 깊게 공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동 사회"라는 바다 위를 부표하다, 에코의 눈을 통해 북극성(True North)의 위치를 아주 잠시 동안 확인한 것이다. 그 위치를 잊고 싶지 않아, PC의 전원을 켜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끝)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출처: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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