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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an 26. 2021

[원서 서평]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할 수 있는 게 없다

1막을 마치고, 이 부조리극의 서평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막을 덮고, 문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다만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글, 특히 작품에 대한 평을 쓸 때 개인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는 주어가 몹시 민망하다. 그런데 글을 읽을 때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고백이 결여되어 있으면 무척 지루하게 다가온다. 내 삶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행위는 관음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자아가 타인의 이해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나 역학에 생리적인 역겨움을 느낄 뿐이다.


"내"가 평론에 개입하는 순간 보편성을 잃고 시의성이 부여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 과거의 "내"가 각인된 평을 읽게 되면 부끄러워진다. "나"는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흥분하며 살아가는데, 과거의 글을 읽다 보면 머물러 있는 전날의 "우리"들이 오늘의 "나"에게 조소를 보내고 있다.


몹시 두껍고 짜임새 있는 전개가 일품인 6부작의 르네상스 역사소설을 읽다가, 4부가 끝나고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읽고 있었던 작품과 정 반대에 있다고 판단되는)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골랐다.


책을 읽는 데는 느긋한 마음으로 읽었음에도 총 3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부분을 곱씹는 재독에 걸렸던 시간이 실제 독서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뮈엘 베케트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루시용이라는 소도시로 피난해 독일군에게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한다. 다만 본인은 자신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해 "보이스카우트"였다고 일축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출처). 개인적 삶에 대해 맹렬하다 싶을 정도로 이해와 소통을 거부하는 베케트의 태도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지속되었는데, 1969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자, 그의 아내인 수잔이 "재앙"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작품 외적인 소통을 불편해했다 (출처).


전쟁이 끝나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베케트는 프랑스어로 3부작 소설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발표했다. 모국어인 영어로 집필하지 않은 이유는 "기교를 부리지 않기 위해(without style)"라고 대답했을 정도로 그는 작품에 본인의 자취를 남기는 것을 거부했다 (출처). 하지만 프랑스 문단에서는 베케트의 3부작에 대해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다. 프랑스 평단 특유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베케트는 오히려 추가적인 소설 집필을 부담스럽게 느끼게 된다. 추후에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집필 계기에 대해, 3부작 이후 쏟아진 관심이 야기한 창작에 대한 중압감을 떨쳐내기 위한 기분 전환이라는 목적이 다소 존재했다 고백한다 (출처).


아이러니하게도, 뉴욕타임스』는 1956년 이 희곡의 공연을 평론하며 사르트르와 제임스 조이스에 비교했을 정도로, 이 작품은 3부작을 뛰어넘는 평단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출처).




시골길. 나무.

저녁.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시골길의 나무 옆에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둘의 대화가 진행되자, 이들은 고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인들이 고도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심지어 고도가 이 곳으로 올지, 어떤 시간에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 그들에게 포조라는 지주가, 짐꾼 럭키를 목줄에 채우고 등장한다. 둘은 장시간 디디와 고고와 목적 없는 대화를 하다가 퇴장한다. 해가 지고,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다음 날. 같은 시간. (Next day. Same time.)

같은 장소. (Same place.)


하루가 지났는데,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포조와 럭키도 다시 등장하고, 더욱 목적이 없는 대화를 하다 퇴장한다. 마지막에 소년이 등장하고, 디디와 고고는 오늘도 고도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먼 곳으로 떠나자 다짐하지만, 생각해보니 고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곳에 있어야만 한다. 나무에 목을 맬까 하지만 끈이 없다. 둘은 떠나기로 결심한다. 움직이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이라는 장르로 분류되고는 한다. 다만, 작품을 읽다 보면, 베케트가 추구하는 부조리(Absurd), 즉 논리의 결여는 단순히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전해온, 기존의 희곡이 가진 논리적 서사구조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라, 분류와 이해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작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민과 분석을 깊게 할수록 작가가 제시했던 방향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그의 삶과 행적을 기반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이 방법론조차도, 본질적으로는 베케트가 거부하는 형태의 소통이라고 보인다.


무대가 되는 시골길은 문자 그대로 길이며, 길은 일련의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다. 고고와 디디는 그 과정에 머무른 상태로,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무언가의 사건을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 to be done).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고고와 디디가 위치한 장소가 마치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연옥(Purgatory)"처럼 보인다. 가톨릭 교리에서는 신의 은총을 받았지만 죄가 완전히 씻기지 않은 이들이 잠정적 기간 동안 정화를 거치는 장소를 연옥이라 칭한다. 연옥은 일시적이며(transient), 유한하되(ephemeral), 정확한 기간을 알 수 없다(uncertain). 하지만 연옥 또한 이들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비유는 아니다. 연옥은 천국이라는 명확한 목적지가 존재하며, 그곳에서 행해야 하는 과정 또한 명백하다. 즉, 연옥에 위치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몹시 자명하다 (Something to be done).


연옥이 되었든, 여행길이 되었든,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존의 존재하는 상징을 통해 이해를 시도할수록 독자의 논리에서 달아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가까이 가려할수록 멀어지는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는 고고와 디디의 대화와 닮아있다. 이해와 소통을 갈구하고, 서로에게 요구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멀어질 뿐이다. 때문에 작품을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시종일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 to be done).


물론 베케트 본인은 이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부조리극"이라는 이름도 결국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어떠한 이해(마저 거부한다는 의미)의 범주 안에 가두기 위한 명명법인데, 만약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본다면, "부조리극" 또한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작가 본인은 이 작품에 "2막의 비희극(a tragicomedy in two acts)"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물론 그는 저 부제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조차 거부할 것이다. 다만, 글에 작가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람이, 직접 모국어로 번역한 작품에 붙인 부제라면, 분명히 <고도를 기다리며>의 정체성에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2막의 비희극"이라는 부제는 "2막"이라는 형태적 특징과 "비희극"이라는 장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비희극"이라는 분류 또한 셰익스피어의 "문제극(problem play)"와 같은 독자적인 방법론이 적용되는 하나의 장르("tragicomedy"라는 한 단어)로 이해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의 특성으로 볼 때는, 두 개의 장르가 중첩되어 분류가 모호한 지점("tragi'c'omedy"라는 복합어, portmanteau)을 의미하고 있다는 해석이 더욱 매력적이다. 물론, 내가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 to be done).


다만,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작품 외의 자아를 노출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던 작가의 글을 읽고,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상이 충만한 평을 남기게 되다니, 모를 일이다.


작가가 직접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글이라면, 원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왜 굳이 영어로 읽었는지 자문해 보아도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냐면, 아무리 여러 번 곱씹어 보아도,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비평적이거나 이성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영어로 읽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1막이 끝난 직후의 감정을 채 추스르지 못한 채, 바로 2막의 시작을 읽었을 때 마주한, 여섯 단어였다.


ACT II
Next day. Same time.
Same Place.


두 번째 이야기.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건조하고 무심하게 던지는 시공간에 대한 단상이, 무척 숨을 막히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나는 머물러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 to be done).




아직도 왜 서평을 쓰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아마 언젠가 "나"의 평가와 해석을 몹시 후회할 듯하다.

원점 회귀한 것 같은데, 의미가 있었나 싶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끝)


『Waiting for Godot』(1955), Samuel Beck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7716.Waiting_for_Go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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