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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an 21. 2021

[원서 서평] 『유향을 받은 병정』, 도로시 더넷

엔드게임의 시작

1553년. 지난 16년 동안 몰타 구호기사단의 단장으로 군림해왔던 스페인 출신의 후안 데 호메데스(Juan de Homedes, 1477 - 1553)의 건강이 악화된다. 2년 전, 오스만 제국의 제독 드라구트(Dragut, 1485 - 1565)와 시난 파샤(Sinan Pasha, ? - ?)가 이끄는 대함대에게 몰타의 이웃 섬인 고조와 북아메리카 최후의 보루였던 트리폴리를 빼앗긴 호메데스와 구호기사단은 위태로운 상황을 마주 하고 있었다.


1553년 구호기사단의 단장 후보: (左) 클로드 드 라 셍글, (中)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右) 레오네 스트로치 [출처: Wikimedia Commons]


호메데스를 이을 수 있는 단장 후보로 거론되는 기사들은 프랑스 출신의 클로드 드 라 셍글(Claude de la Sengle, 1494 - 1557),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Jean Parisot de la Valette, 1494 - 1568), 그리고 플로렌스의 명문가, 스트로치 가문 출신의 풍운아 레오네 스트로치(Leone Strozzi, 1515 - 1554) 정도였다. 유럽의 패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무대인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종교적 성전과 정치적 암투라는 두 가지 전선을 펼친 구호기사단은 뛰어난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1553년. 구호기사단이 위치한 지중해의 패권은 카를 5세(Karl V, 1500 - 1558)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과 앙리 2세(Henry II, 1519 - 1559)가 이끄는 프랑스가 양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유럽과 중앙아시아까지 포함하는 유라시아의 역사에서 당시 서방세계의 최강자는 심지어 그의 적인 기독교인들도 존경심을 담아 '대제(The Magnificent)'라고 부른 쉴레이만 1세(Suleiman I, 1494-1566)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인 쉴레이만 1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26세에 제위에 올라, 젊은 시절 내내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이는 호전적인 면도 있었지만, '입법자(Kanuni)'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법전의 정비에 집중하였다. 완성된 르네상스 군주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과 문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쉴레이만 1세는 본인이 무힙비(Muhibbi, 연인)라는 필명을 사용해 연애시를 쓰고는 했는데, 바로 이 연애시의 대상이 록셀라나(Roxelana)라고도 불리는 그의 황후, 휘렘 술탄(Hurrem Sultan, 1502 - 1558)이다.


(左) 쉴레이만 1세, (右) 휘렘 술탄 [출처: Wikimedia Commons]


알렉산드라 리소프스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휘렘은 우크라이나 출신(당시에는 폴란드 문화권으로 구분되는 로하틴 지방)의 정교회 사제의 딸로, 어린 시절에 타타르 족의 침공에 포로로 붙잡혀 노예가 되어 하렘으로 보내진다. 당시 하렘의 주인이었던 하프사 술탄은 자신의 아들인 쉴레이만 1세에게 알렉산드라를 선물한다. 이미 두 명의 측실에게 자식을 얻고, 심지어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인 세흐자데(Şehzade, 터키어 "왕자") 무스타파를 두고 있었지만, 쉴레이만 1세는 동유럽 출신의 지혜로운 미녀, 알렉산드라에게 지독하게 반하게 된다.


쉴레이만 1세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측실만을 두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었는데, 쉴레이만 1세는 알렉산드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정식 결혼을 결정한다. 단순히 제도적인 결정뿐만이 아니었다. 황후에게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 '휘렘(Hurrem)'을 선물하고, 황제를 위해 준비된 미녀들로 가득 찬 하렘에서 다른 어떠한 측실도 찾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전통에서 세흐자데는 나이가 차면 지방으로 내려가 총독으로 근무하며 자질을 증명해야 했는데, 이때 세흐자드의 어머니인 모후도 함께 지방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쉴레이만 1세는 그녀가 죽는 날까지 휘렘 황후만을 사랑하였고, 그녀가 평생 수도에 있을 것을 천명하였다. 쉴레이만 1세는 휘렘 술탄을 옆에 두기 위하여 이러한 전통 또한 깬 것이다.


1553년. 휘렘 술탄과 그녀의 조력자 루스템 파샤(Rüstem Pasha, 1500 - 1561)는 황제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코니아 지역에서 총독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있던 세흐자드 무스타파를 제거하고, 휘렘의 아들인 셀림을 술탄으로 올리기 위한 술책을 전개해간다.


도로시 더넷의 6부작 역사소설 《라이몬드 연대기》의 4부, 유향을 받은 병정』은 1553년, 스위스의 바덴 지역에서 시작해 프랑스의 리옹을 거쳐 북아프리카의 마디아, 제르바섬, 주아라, 그리스 지역의 자킨토스, 알레포, 테살로니키를 지나 이스탄불에 이르는 라이몬드와 그의 동료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유향을 받은 병정은 지금껏 더넷이 창조해 낸 라이몬드의 모험 중 가장 속도감 넘치고 깊이 있는 서사를 자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라이몬드(그리고 독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다. 지난 3권에 걸친 서사를 통해 지략, 무예, 예술, 언어 등 빠지는 분야가 없는 능력과, 그에 어울리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보여왔던 라이몬드는 전작인 무질서한 기사들에서 드디어 호적수를 만나게 된다.


라이몬드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과 그를 괴롭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악의를 충분히 보인 그는 라이몬드도 모르고 있던 사생아를 포로로 삼는 계략을 펼친다. 여왕들의 수에서 라이몬드와 단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었던 아일랜드 출신의 망명 귀족 우나 오드와이어는 그의 적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에서 그의 아들을 출산한다. 자신의 적에게 사생아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 라이몬드는 둘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보내는 선물을 호송하는 대사가 되기를 자청하고, 지중해 전체를 무대로 목숨을 건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라이몬드의 소꿉친구이자 전작에서 몸 담고 있던 구호기사단을 탈퇴한 제롯 블라이스, 어린 소녀 시절부터 기구한 악연으로 라이몬드를 알아온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의 귀족 소녀 필리파 소머빌, 라이몬드의 충복 아치 애버내시, 그리고 프랑스의 황제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보내는 선물, 기계식 스피넷을 만든 장인 조르주 고티에와 그의 조카 마르트 또한 각자 개인적인 이유로 라이몬드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다.


독자를 위한 사디즘

미국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단편소설집인 『바곰보 스너프 박스』에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한 8가지 팁을 제시한다 (출처).  


독자를 완전히 낯선 이로 대하고, 그가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고 느끼도록 써라

독자가 응원할 수 있는 인물 최소 한 명을 제공하라

모든 등장인물은 무언가를 원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비록 물 한잔일지라도.

모든 문장은 둘 중 하나를 달성해야 한다: 인물을 밝히거나, 사건을 진행시키거나.

가능한 이야기의 끝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라.

사디스트가 되어라.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착하고 순수할지라도, 그들을 최악의 상황에 밀어 넣어라. 그 순간에 독자는 인물이 정말 어떠한 사람인지 볼 수 있게 된다.

단 한 명의 독자만을 위해 써라. 만약 창문을 열고 세상 모두를 만족시키려 한다면 이야기는 폐렴에 걸리게 된다.

독자에게 가능한 선에서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하라. 긴장감 따위는 버려라. 독자는 이야기에서 어떠한 일이, 어디서, 왜 벌어지고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심지어 바퀴벌레가 책의 마지막 몇 장을 먹어버렸다면, 독자가 직접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비 작가를 위한 글쓰기 규칙 종류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심지어 소설이 아니라 어떠한 글을 쓰더라도 큰 도움이 되는, 말 그대로 인생을 바꾼 조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보네거트 본인도 이 리스트를 단편소설을 쓰는 방법론에서 다루고 있었기에, 위 8개의 팁이 모든 글에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게도 더넷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8개의 조언이 《라이몬드 연대기》와 깊게 공명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더넷이 장인의 수준으로 이 역사 소설에 접목시킨 부분이 바로 6번이다. 물론 시리즈 내내 이러한 경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유향을 받은 병정은 유난히 주인공 라이몬드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한까지 몰아세운다.


『유향을 받은 병정은 600페이지가 넘는 긴 서사 중에도 거의 한 페이지도 숨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는데, 실제로 많은 더넷의 팬들은 이 작품을 6부작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완성도 높은 소설로 꼽기도 한다. 《라이몬드 연대기》의 오디오북을 녹음한 성우인 데이비드 몬티스(David Monteath) 또한 도로시 더넷 소사이어티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유향을 받은 병정의 "그 장면"이 몹시 충격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출처).


전작에서 스코틀랜드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반란 음모를 들키고 모욕적으로 추방당한 라이몬드의 라이벌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 그는 라이몬드를 바로 죽이기보다는 그가 아끼는 동료와 주변 인물들 모두를 파괴하면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선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때문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동료인 제롯 블라이스와, 이제 15살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한 필리파 소머빌이 위험에 처할까 봐 라이몬드는 그들을 계속 내치고 돌려보내려 한다.


이러한 와중, 겨우 알제리에서 우나 오드와이어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녀는 라이몬드가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사생아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지만 아이의 행보가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결국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라이몬드는 동료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아이를 찾기 위해 북아리카와 지중해 뱃길을 따라 추적해간다. 이 처절한 여행의 종착역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세계 최대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스탄불이다.


라이몬드는 이 모든 개인사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을 호령하는 최강대국의 두 국왕 사이에서, 지중해를 누비는 구호기사단과 오스만의 해군 사이에서, 오스만의 술탄 쉴레이만 1세와 그가 사랑하는 아내 휘렘 술탄, 그리고 휘렘이 낳지 않은 후계자인 세흐자데 무스타파 사이에서, 곡예와도 같은 줄타기와 균형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더넷의 사디즘은 이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유향을 받은 병정에서는 특히 라이몬드가 처한 모든 상황은 바로 직전의 상황보다 악화되었거나, 해결책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 라이몬드는 15살의 소녀 필리파 소머빌을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지만, 라이몬드의 사생아에 대한 별도의 정보를 얻게 된 필리파는 자의로 어린아이를 추적하는 여행길에 오른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라이몬드는 스코틀랜드에 있어야 할 필리파를 휘렘 술탄의 하렘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커트 보네거트가 사디스트가 되라고 했던 이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라이몬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과 동료의 목숨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함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라이몬드는 자신의 몸을 팔고, 주저 없이 독을 마신다. 필리파 소머빌은 10대 중반의 소녀가 걷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길을,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라이몬드 연대기》가 출판된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를 끌게 만드는 데는 더넷 특유의 3인칭 묘사가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시리즈의 제목이 《라이몬드 연대기》이고 3천 페이지, 6권 내내 라이몬드의 행적을 따라가고 있지만, 더넷은 지독할 정도로 라이몬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조연 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집중한다.


라이몬드의 의식의 흐름과 행동의 이유는 모두 독자의 상상과 추리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이 상상과 추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장치가 바로 더넷이 만들어내는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보네거트의 말 마따나, 독자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라이몬드를 보면서 그가 진실로 어떠한 사람인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각자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낭만에 대하여

시리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1부 왕들의 게임』과 2부 여왕들의 수는 각자 소설 내에서 어느 정도 소설이 시작할 때 제시하였던 문제를 해결하면서 종료가 된다. 3부 무질서한 기사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4부 유향을 받은 병정에서 마무리된다. 당연하지만, 더넷은 《라이몬드 연대기》의 개별 소설의 제목들을 체스의 말에서 가져왔는데, 1부부터 3부까지는 소설의 제목이 서사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4부의 제목은 어느 정도 작품 내에서도 여러 번 언급이 되는데, 라이몬드는 자신의 라이벌이 사생아를 "병정(폰)"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체스판에서 반대편 끝에 도달하는 병정은 다른 말로 "승진"을 할 수 있는데, 작품 내에서는 이스탄불에 있는 술탄의 궁정에 도착하는 여행과 어느 정도 겹쳐서 설명이 된다. "유향"은 기독교에서 3명의 동방박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물한 세 가지 예물 중 하나였는데, 때문에 신성, 또는 왕권을 상징하는 기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즉, 제목 유향을 받은 병정의 의미는, 이야기 전체로 보았을 때는 이스탄불에 도착해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난 라이몬드의 사생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저 단어의 조합이 실제로 소설 안에서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원문:

"God damn you both," Jerott said through his teeth, and flinging away from her, stood, breathing hard, at the one unshuttered window, unseeing, his hands fists on the sill. "You summon and you throw away. You treat love like a bird for the table… Like a pawn, now in frankincense, now discarded and thrown in the dirt. You don't know what love is, either of you. And God help us and you, if you ever find out."


번역:

"당신들 둘 모두 빌어먹을 자식들이야," 제롯은 이를 갈면서 그녀에게서 홱 몸을 돌리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유일하게 열려있는 창문으로 걸어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은 채, 창문틀 위에 주먹을 올렸다. "둘 모두 사람을 부르고 나서는, 휙 던져 버리지. 둘 모두 사랑을 마치 식탁 위에 올라가는 닭요리처럼 대할 뿐이야. 마치 체스의 병정을 들고서는, 어떨 때는 유향을 피워가며 경배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땅에 던져 버리는 것처럼. 너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둘 다. 만약 언젠가 알게 된다면, 그 고통을 마주해야 할 우리와 너희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바라지."


너무나도 직선적이고 정의로우며 헌신적인, 그래서 오히려 다른 소설이었다면 고전적인 기사도의 주인공 역할이었을 제롯은, 동행인 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라이몬드와 그녀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공통점을 찾게 된다. 《라이몬드 연대기》의 서사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라이몬드의 독특한 인간적 특징은 고통을 대하는 방법이다. 라이몬드는 타인과 고통을 공유하거나,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단언적으로 거부한다. 이는 그의 초인과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주위의 모든 인물들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 약점이기도 하다.


사무치는 감정을 유향과 병정을 사용해 전달한 표현력도 몹시 기발하지만, 제롯의 대사는 아마 독자들이 라이몬드에 대해 느끼는 감상을 가장 애절하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라이몬드 연대기》는 고증에 충실한 정치극, 휘몰아치는 액션 모험 활극, 속고 속이는 음모로 촘촘하게 채워진 추리극 등, 다양한 장르를 르네상스 역사라는 무대 위에 조화롭게 펼쳐나가는 맥시멀리즘 소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르적 장치를 관통하는 가치는 바로 제롯의 대사에서 보이는 낭만주의이다. 그리고 유향을 받은 병정은 더넷이 펼쳐놓은 가혹한 시련 속에, 낭만주의적 가치가 완전히 꽃을 피우는, 시리즈의 터닝포인트이자, 5부와 6부에서 이어질 체스의 엔드게임을 알리는 작품이다.


(끝)


『Pawn in Frankincense』(1969), Dorothy Dunn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60455.Pawn_in_Frankin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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