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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Jan 06. 2021

[원서 서평] 『무질서한 기사들』, 도로시 더넷

르네상스 기사도 로망 비틀기

1548년.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 5살의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Mary I o Scotland, 1542 - 1587)와 그의 어머니, 프랑스 귀족 출신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1515 - 1560)는 호시탐탐 북쪽을 바라보며 브리타니아 통일을 계획하고 있는 잉글랜드의 음모를 벗어나기 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한다.


스코틀랜드 왕실 입장에서는 메리 스튜어트가 성인의 나이가 될 때까지 프랑스 왕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면 잉글랜드의 야욕에서부터 안전할 것이며, 한편 프랑스 왕실에서는 매리 스튜어트를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시킨다면 잉글랜드를 압박할 수 있는 통일왕국의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그림이었다. 물론 메리 스튜어트의 친정인 드 기즈 가문이 프랑스 국왕 앙리 2세(Henry II, 1519 - 1559)의 심복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1548년. 어린 국가의 수뇌가 망명정부 상태로 국외에서 양육되고 있는 사태를 관망해야 하는 스코틀랜드 본국은 몇 안 되는 충신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 잉글랜드와의 국경선에 위치한 두 변경백 가문인 스콧(Scott)과 커(Kerr) 가문은 몇 대째 지속된 험악한 관계로 자주 폭력사태를 일으켰는데, 둘 사이를 중재시켜줄 왕실의 부재는 이 악연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1551년. 지중해 중간에 위치한 척박하고 작은 몰타 섬에는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 짧게는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이라고 불리는 유래 깊은 기사단의 거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민중에 대한 보호 활동과 의료 봉사로 전 유럽에서 존경받아온 이 기사단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세력에 맞서 기적에 가까운 거룩한 성전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기사단의 단장은 스페인 출신의 후안 데 호메데스(Juan de Homedes, 1477 - 1553)였다.


1551년 7월, 오스만의 제독 시난 파샤(Sinan Pasha, ? - ?)는 10,000명에 가까운 해군을 이끌고 구호기사단의 거점인 몰타를 공격하지만 기사단의 거센 저항으로 물러나고, 방향을 돌려 기사단의 분파가 있던 고조 섬으로 향한다. 몰타와는 달리 상시 병력이나 방어 준비가 부족했던 고조는 시난 파샤의 공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난 파샤는 기세를 이어 30명 정도의 프랑스인 기사단원이 지키고 있던 트리폴리를 공략하고, 함락시킨다. 고조와 트리폴리에서 오스만 제국은 각각 5천 명과 600명이 넘는 기독교인을 포로로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도로시 더넷의 6부작 역사소설 《라이몬드 연대기》의 3부, 『무질서한 기사들』은 1548년, 혼란에 빠진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국경에서 시작해, 1551년부터 1552년 사이, 몰타 공성전, 고조와 트리폴리의 패배 이후 구호기사단원들의 행적들 사이로, 지중해와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라이몬드의 프란시스 크로포드가 만들어가는 활극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무질서한 기사들』은 6부작 전체로 보았을 때는 라이몬드가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전작 『여왕들의 수』에서 본인의 위장 신분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제어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향락과 유흥에 매몰되었던 라이몬드는, 결말에서 '컬터 가문의 후계자 (Master of Culter)'가 아닌 새로운 신분, 즉 자신만의 운명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본 작품부터는 '세비니 백작 (Comte de Sevigny)'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가문의 후광을 벗어나 본인의 능력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어울리는 영웅의 탄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본 작품이 가진 서사적 매력의 가장 커다란 지분율은 당연히도 본 작품에서 신규 등장하는 구호기사단원들과, 라이몬드가 귀국한 후 직접 창설하는 세인트 메리 용병 단원들의 입체적인 인물상에게 돌려야지 마땅하다. 대부분의 기사단원은 실제 역사상의 인물들이지만, 라이몬드의 유년 시절 친우이자 기사단원인 제롯 블라이스, 그리고 가브리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기사단의 정신적 지주, 기사도의 정수처럼 보이는 그레이엄 리드 말렛은 작가의 창작이다.


더넷은 역사적으로는 고귀하게만 그려지는 몰타의 구호기사단의 빛과 그림자를 묘사한다. 기사단은 지정학적으로 프랑스 출신과 스페인 출신의 기사들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였는데, 더넷은 이 사실을 단순히 출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서, 당시 유럽을 이끄는 두 초강대국의 대리전쟁으로 해석한다, 1551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던 카를 5세(Karl V, 1500 - 1558)였고, 이에 맞서는 프랑스의 국왕은 앙리 2세였는데, 두 국왕은 기사단이 가진 무력과 상징성 모두에 주목하면서 기사단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움직이려고 안배한다.


소설의 도입 부분에서는 기사단이 위치한 몰타 섬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의 선물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당시 기사단장 또한 신성 로마 제국, 즉 스페인 출신인 후안 데 호메데스였기 때문에, 프랑스 기사들의 입지가 몹시 좁아진 상태로 묘사된다. 전작에서 프랑스 왕실과 친분 관계를 확립한 라이몬드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앞서 유능한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한 프랑스 출신 구호기사단에게 스카우트되는데, 본인의 정치, 또는 종교적 신념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성전에 참여하게 된다.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작고 척박한 섬, 몰타로 향하는 1만 명이 넘는 오스만 제국의 해군, 그리고 그의 1/10이 채 안 되는 규모로 응전을 준비하는 풍전등화의 구호기사단. 라이몬드가 갤리선 노잡이로 복무하던 시절의 인연인 드라구트(Dragut, 1485 - 1565)는 '이슬람이 뽑아 든 검 (The Drawn Sword of Islam)'이라는 무명을 떨치며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 되어 칼 끝을 기사단에게로 돌린다.


르네상스의 귀족 가문 차남이 살아가는 방법

『무질서한 기사들』은 《라이몬드 연대기》 6부작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완급조절, 박진감 넘치는 전쟁과 전투 묘사, 다루고 있는 역사적 배경의 처절함과 철저한 고증의 묘사, 그리고 시리즈 최고의 악역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역사소설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1부 『왕들의 게임』에서 자신을 향한 누명을 완벽히 벗었지만, 본인의 성정으로 인하여 복잡하게 꼬인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낀 라이몬드는, 2부 『여왕들의 수』에서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시한부 작위인 '컬터 가문의 후계자' 신분이 친형 리처드의 아들 탄생으로 인해 사라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 궁정으로 향한다. 살벌한 음모가 오가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살충동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행보를 보이면서도 기적같이 목숨을 부지한 라이몬드는 3부의 시작에서 아직도 인생의 목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지점부터 라이몬드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노래했던 수많은 방랑 기사들의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실제로 모든 작위와 상속권이 장자에게 있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귀족 가문의 차남, 삼남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했는데, 기사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에 무명을 떨쳐 본인의 영지를 얻거나, 또는 종교에 귀의하여 성직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 많았다.


전자의 예로는 물론 몇백 년 전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가장 위대한 기사 (The Greatest Knight)'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l, 1146/1147 - 1219)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소설의 무대에서 직전의 시대에 살았던 메디치 가문의 차남이자 가톨릭 교회에 귀의한 후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른 레오 10세(Leo X, 1475-1521)가 있다.


기사가 추구하는 용맹한 무위와, 종교가 추구하는 거룩한 신성을 동시에 손에 얻을 수 있는 신분이 바로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유명한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 그리고 이 소설의 중심 축인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이었다. 물론 기사단에 가입하는 인물들은 평생 동안 독신을 맹세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가문을 남기고자 하는) 야망이 큰 귀족 가문의 차남들에게는 매력도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신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1560년대 이후에야 조심스럽게 사용이 시작되었을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종교와 유일신에 대한 관점이 근대와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 이루어진 종교 개혁 또한 신의 존재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숭배의 방법론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에 '살아있는 신의 검'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구호기사단원으로의 인생은 그 목적의 고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명감을 선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구호기사단의 이미지를 집대성한 듯한 인물인 대십자 기사(Grand Cross), 그레이엄 "가브리엘" 리드 말렛은 등장 전부터 지중해를 뒤흔드는 무명을 떨치는데, 실제로 독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 안달이 날 때쯤 묘사되는 그의 첫 등장 장면은 더넷의 문장력이 가진 자연스러운 흐름에 감탄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문:

"And the Grand Cross who hailed you?" Moving to de Villegagnon's side, Lymond watched as, below, the rope ladder swung down from the poop for the four knights to ascend. The man in question, already standing, was the first to lay hands on the ladder. He glanced up, grimacing: a tall, broad-shouldered knight in early middle years with hair brighter than Lymond's own―a brief cap, ruthlessly cropped, of guinea-gold, with a vein of his sister's apricot at the crown. "Gabriel," said the Chevalier de Villegagnon, with the tension gone from his voice. And so Lymond and Graham Reid Malett met.


번역:

"그러면 당신들을 불러 세운 대십자 기사는 어디 출신이지?" 드리워진 밧줄 사다리가 흔들리며 빌레가뇽의 곁으로 움직인 라이몬드는 네 명의 기사들이 갑판부로 올라올 수 있도록 줄사다리가 아래로 드리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질문의 주인공인 남자는 이미 서서 자세를 잡고 줄사다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살짝 찡그리며 위쪽을 올려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이 기사는 젊은 축에 속하는 장년의 나이로 보였는데, 라이몬드의 머리보다 더 밝은 색의 머리카락은 몹시도 짧게 깎아 금화와도 같은 색깔로 빛나고, 정수리는 그의 여동생이 자랑하는 살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브리엘." 슈발리에 드 빌레가뇽은 긴장이 풀어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라이몬드와 그레이엄 리드 말렛은 만났다.


가브리엘은 소설 내내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라이몬드를 구호기사단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재미있게도 라이몬드는 다른 르네상스 기사도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거쳐가야 할 필수 과목인 기사단과 그들의 성전에 지속적으로 조소를 보낸다.


위대하지만 애잔한 고전 영웅

트리폴리, 몰타, 고조 공성전을 모두 거친 라이몬드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신을 따라온 몇 명의 구호기사단에게 과시하듯이 기사단과는 완전히 반대의 가치를 주장하는 용병단 세인트 메리를 설립한다.


화가 애덤 블랙록, 변호사 퍼기 호딤, 의사 랜돌프 벨, 인문학자 알렉산더 거스리, 건축가 랜슬롯 플러머 등으로 이루어진 세인트 메리는 구성인원부터 기사단의 안티테제로 묘사되며, 라이몬드 또한 용병단의 당위성을 지극히 세속적으로 정의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세인트 메리의 용병들에게 두 변경백인 스콧 가문과 커 가문의 껄끄러운 관계로 어지러워진 스코틀랜드 국경의 안정을 되찾아 세인트 메리의 무위를 떨치고, 그 뒤 유럽으로 건너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제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넷이 《라이몬드 연대기》를 집필한 목적 또한 드러난다. 그녀는 소설의 짧은 서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원문:

I wished to explore, within several books, the nature and experiences of a classical hero: a gifted leader whose star-crossed career, disturbing, hilarious, dangerous, I could follow in finest detail for ten years. And wished to set him in the age of the Renaissance.


번역:

저는 몇 권의 책에 걸쳐, 클래식한 영웅의 본성과 경험을 탐험하고 싶었습니다. 뛰어난 재능의 지도자로, 하늘의 별을 화나게 한 기구한 운명이 충격적이고, 유쾌하며, 위험한 형태로 펼쳐지는 과정을 가장 세세한 면모까지 따라가며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도록 배치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르네상스 시대인 것은 더넷이 본격적으로 의도한 바였다. 라이몬드는, 물론 역사적으로는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인본주의의 전조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중세를 이어 르네상스까지 넘어온 종교라는 미망에서 조금 일찍 깨어났는데, 바로 이 차이가 그녀가 말하는 기구한 운명을 만들어가게 된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굳이 라이몬드의 인생을 묘사하면서 "star-crossed"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시작하며 "하늘의 별을 화나게 한" 불운한 두 연인의 관계를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몹시 뛰어난 역사적 고증과는 달리, 소설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라이몬드의 사상은 거칠게나마 카뮈나 니체의 실존주의가 연상될 정도로 현대적인 면모가 있다. 어쩌면 르네상스는 20세기 중반을 살아가던 더넷의 관점에서, '고전 역사(Classical History)'의 마지막을 상징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낭만적인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라이몬드 연대기》의 주인공,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애잔한 삶을 살아가는 라이몬드는 소설 외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배경이 되는 시대부터 약 50년쯤 후에야 등장할 『돈키호테』의 주인공, 애잔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돈 키호테 데 라 만차의 안티테제라는 묘한 분석이 가능하다. 라이몬드가 시대를 지배하는 꿈에서 남들보다 일찍 깨어버려 불행하다면, 50년 후, 돈 키호테는 시대가 깨어나 버린 꿈에 아직 젖어있는 영웅이기에 불행한, 마치 격변기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듯한 관계가 대단히 흥미롭다.


만약, 위의 가정이 사실이고, 의도적이었다고 해석한다면, 작가는 서문에서부터 서양문학을 상징하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운명론과, 세르반테스 역사소설의 탈시대성에 모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감히 흉내를 낼 엄두도 나지 않는 그녀의 문장력과, 20세기 가장 완벽한 역사소설이라고 밖에 평할 수 없는 고증과 흥미를 제공하는 《라이몬드 연대기》를 읽다 보면 이 도전이 절대로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감상이 놀라울 뿐이다.


(끝)


『The Disorderly Knights』(1966), Dorothy Dunn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51211.The_Disorderly_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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