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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Dec 11. 2020

[원서 서평] 『여왕들의 수』, 도로시 더넷

16세기,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르네상스 맥시멀리즘의 시작

1550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7살의 소녀 메리 1세(Mary Stuart, Mary I of Scotland, 1542 - 1587)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왜 유년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태어난 배경을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James V, 1512 - 1542)는 재위 내내 본인의 외숙부이자 잉글랜드의 국왕인 헨리 8세(Henry VIII, 1491 - 1547)와 마찰을 일으켰다. 두 국왕의 갈등은 1542년,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대패로 마무리되고, 제임스 5세는 패배의 충격과 더불어, 전투 직후 태어난 자신의 첫 아이가 딸인 것을 확인하고는 신경쇠약으로 요절한다.


잉글랜드의 왕실은 태어나자마자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를 헨리 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1553)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합병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메리 1세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Marie de Guise, 1515 - 1560)는 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녀를 브리타니아 섬 외부에서 키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본인의 고향이자, 친정인 기즈 가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마리 드 기즈의 형제들 중에는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Francis, Duke of Guise, 1519 - 1563), 로렌의 추기경 샤를(Charles, Cardinal of Lorraine, 1524 - 1574) 등, 국왕 앙리 2세(Henry II, 1519 - 1559)의 심복이 있었기에, 젊은 대비(Queen Dowager)와 어린 여왕은 안전한 생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左)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右)


한편 프랑스 왕실 입장에서는 앙리 2세의 아들, 도팽(Dauphin, 프랑스의 왕세자를 의미하는 고유 작위) 프랑수아, 즉 미래의 프랑수아 2세(Francis II, 1544 - 1560) 또한 메리 1세와 비슷한 나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만약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고, 메리 1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지켜낼 수 있다면, 둘의 자녀는 통합 프랑스-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미래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도로시 더넷의 6부작 역사소설, <라이몬드 연대기>의 2부인 <여왕들의 수>는 마리 드 기즈와 메리 1세가 무사히 프랑스로 탈출한 직후 시작된다.


1550년. 전작 『왕들의 게임』에서 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역모 혐의에서 결백을 증명하는 데 성공해 평판의 회복과 가족 간의 화목을 되찾은 라이몬드의 프란시스 크로포드는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탈출을 도운 마리 드 기즈 대비의 소환을 받는다. 마리 드 기즈는 프랑스에서도 자신의 딸,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 메리 1세를 향한 암살 음모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이 라이몬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역모 혐의로 인한 5년간의 망명 시절, 라이몬드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왕국에 적과 동료를 만들었기에 (1부 『왕들의 게임』에서도 그의 모친 시빌라가 지나가듯이 아들이 "유럽 모든 세력의 호의를 배신했다 (this criminal has cheated his way out of favour with every party in Europe)"고 평하기도 한다) 메리 1세의 신하, 스코틀랜드의 귀족 프란시스 크로포드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좁다고 판단한다. 암살 모의자를 밝혀내기 위해 아일랜드 출신의 위장 신분 아래 프랑스로 건너간 라이몬드는 메리 1세를 향한 음모의 날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것을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디에프에 도착해 위장 신분으로 프랑스 왕실의 귀족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 라이몬드는 앙리 2세를 따라 디에프에서 루앙, 생제르맹, 앙부아즈, 블루아로 이어지는 여행을 한다. 라이몬드는 귀족들 앞에서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주정뱅이 아일랜드인을 연기하고, 뒤로는 온몸을 던져 메리 1세를 향한 암살 음모를 막는데 매진한다. 암살 주모 세력에 가까워지는 만큼 부상, 음주, 음독으로 그의 몸이 피폐해져 가고, 여왕을 지키기 위하여 그의 주변 인물을 희생시키거나, 그가 아끼는 인물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그를 정신적으로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운다.


라이몬드 내면으로의 여행

도로시 더넷은 데뷔작 『왕들의 게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올랐고, 해당 작품은 사실 연작 소설군의 1부가 아니라 독립(standalone)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결말을 보여준다. 때문에 『여왕들의 수』를 읽기 전에는 우려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넷은 몹시 영리한 방법으로 『여왕들의 수』를 초반부터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왕들의 게임』은 르네상스 시대의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맥시멀리즘 역사소설에 가까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는 시리즈의 제목이 《라이몬드 연대기》 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시선에서 상황을 조명하기보다는 그를 관망하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독자가 서사 중 등장하는 스코틀랜드의 다른 인물들처럼, 라이몬드에 대해 각자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상극의 형태를 통해 독자는 라이몬드의 친형이자 현재 컬터의 남작인 리처드 크로포드, 그의 아름다운 아일랜드 아내 마리오타, 뼛속까지 스코틀랜드 사나이인 월터 스콧과 그의 감수성 풍부한 아들, 윌 스콧- 그리고 리처드와 라이몬드 머리 위에 있는 형제의 어머니, 시빌라의 시선을 빌려, 종장 직전까지 라이몬드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수없이 수정하게 된다. 이 독특한 문체는 《라이몬드 연대기》를 읽는 모든 독자들이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는 더넷만의 강점이며, 서사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몬드에게 에니그마를 드리우는 장치로 활용된다.


더넷은 『왕들의 게임』의 결말에서 라이몬드의 진실을 알게 된 독자들을 위해, 과감하게 전작에서 공들여 조형한 인물들을 스코틀랜드에 남기고 주인공을 프랑스로 보낸다. 또한 그에게 위장 신분을 부여함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의 눈으로 성숙해가는 라이몬드를 관찰하게 만든다.


2부의 시작 지점에서 라이몬드는 불과 24세이지만, 그는 16세에 솔웨이 모스 전투에 참전하여 누명을 쓰고 스코틀랜드를 탈출한 이후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생존, 그리고 결백의 증명이라는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다. 1부에서 피나는 (문자 그대로) 노력 끝에 결백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라이몬드미뤄온 내면 성장을 시작해야 한다.


원문:

Presently he said, "I seem to be armoured with scythes no one can see. Every breath I draw seems to twist some blameless planet from its orbit."


번역:

그는 곧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낫들로 무장한 것 같네. 내가 내쉬는 숨 때문에 무고한 행성이 궤도에서 튕겨나가지."


『여왕들의 수』는 라이몬드의 치기 어린 젊음과 무모한 행동이 한계와 마주하고, 그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과 그것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으로 그를 몰아간다. 때문에 전작이 라이몬드라는 개인의 행적만큼 커다란 비중을 할애해 스코틀랜드라는 국가성을 묘사했다면 본작에서는 라이몬드가 가진 내적 갈등과 인간관계의 갈등에 집중해, 전작에서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모든 등장인물들의 철천지수이자 완벽한 인물처럼 보였던 라이몬드에게 불완전한 심리 상태와 약점, 그리고 거기서 오는 인간성 또한 부여한다.


라이몬드 연대기: 르네상스 맥시멀리즘의 시작

물론, 『여왕들의 수』는 기본적으로 활극 모험 소설이기에, 책의 목적은 중세 철학에 대한 통찰, 또는 형이상학적인 고민과는 동떨어져 있다. 더넷은 유흥을 위한 글을 쓰고 있다는 목적의식을 절대로 잃지 않는다. 『여왕들의 수』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인 블루아(Blois) 옥상 추격 장면은 21세기 블록버스터 영화, 〈본 얼티메이텀〉(2007), 〈007 스카이폴〉(2012)에서 보이는 옥상 추격 시퀀스와 비교하여도 흠잡을 데가 없는 액션 연출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숨 막힐 정도로 재미있는 유흥거리 아래에는 더넷이 씨름하고 있는 역사소설의 역할에 대한 고뇌가 자리 잡고 있다. 전작인 『왕들의 게임』이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맥시멀리즘 역사소설이었다면, 『여왕들의 수』는 《라이몬드 연대기》 6부작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 르네상스 맥시멀리즘 역사소설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라이몬드 연대기》는 단순한 역사 로망스를 넘어서 이 시대 유럽 전체의 정수를 담기 위한 시도이다. 하지만 도로시 더넷은 이 작품을 통해 역사의 주류에서 지속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체스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의 제목은 당연히 16세기 유럽의 국제적 정치 상황과 정략결혼을 통한 각 왕실의 야욕에 대한 풍유지만, 그 아래에는 프랑스 왕실의 유흥거리로 전락해버린 소국의 설움 또한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망명 정부의 신분으로 소설 내내 암살의 위험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스코틀랜드 대비 마리 드 기즈와 메리 1세,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시골인 아일랜드의 외교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국외에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경박하고 무심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하는 배로우 공작 펠림 오리엄로(Phelim O'LiamRoe),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고향 아일랜드의 독립을 꿈꾸는 음울하고 아름다운 공녀 우나 오드와이어, 이제는 본인이 어떠한 왕실과 왕족에게 충성하고 있는지도 망각한 스코틀랜드 궁수 출신 용병 로빈 스튜어트. 더넷이 주역으로 발탁한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들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어떠한 역사소설과 비교하여도 비주류의 인물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게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야를 제공한다.


어쩌면 더넷이 《라이몬드 연대기》를 집필하며 향하고 있는 목적지에는 역사소설이 역사서와 별개로 어떠한 독자성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재미있게도 『전쟁과 평화』의 종장에서 톨스토이가 전개하는 역사관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톨스토이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역사가 어떠한 시대정신이나 사상가, 철학가, 영웅의 움직임을 통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고찰, 그 고찰이 모여 내린 결정, 그 결정이 모여 살아간 삶, 그 삶이 모여 형성된 대중으로 인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를 《라이몬드 연대기》에 비추어 재해석해보자면, 더넷은 비주류, 역사에서 잊힌 소국과 무시당한 이들의 삶이 모여, 주류 역사의 흐름이 바뀐다는 기획을 통해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결국 라이몬드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메리 스튜어트는 무사히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로 자랄 수 있었고,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으로 처형당했을지라도, 그녀의 아들은 브리타니아 최초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통합 군주인 제임스 6세로 자라 대영제국의 초석을 쌓았다.


(끝)


『The Queens' Play』(1964), Dorothy Dunn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12080.Queens_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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