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를 시작한 첫 주는 낯섦과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친구들도 외국인이고 선생님도 외국인이다. 이들도 처음 이 교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의 나를 겪었겠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들 사이의 국경선은 빨리 허물어졌다. 우리는 그저 함께 영어공부를 하는 친구들일뿐이고, 선생님의 제자들이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
'괜찮아, 배우려고 왔으니까'
6월 2일은 영국 여왕의 탄생일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중요한 국경일이다. 이 집에서 함께 홈스테이를 지내는 모하메드가 돌아왔다. 연휴를 맞아 여행을 다녀왔단다. 그러고 보니 내방 옆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방에 이미 다른 학생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안 친구 모하메드와 어색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어학원에 가는 첫날이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이후 줄곳 흐린 날씨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적당히 차갑고 상쾌한 공기이다. 집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첫날이라 홈스테이 맘 쥬디스가 차로 데려다줬다. 앞으로 걸어 다니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다. 모하메드는 자전거를 타고 먼저 가버렸다.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어학원이다. 생각해오던 '학원'의 느낌보다는 학교, 유치원 같은 느낌이다. 내게는 딱 적당한 분위기다. 말하기 수준이 유치원 수준이니 말이다. 정확히 영유아 수준이다. 가장 눈에 띄는 넓은 거실, 이곳을 스튜던트 룸이라 부른다. 통기타와 전자피아노가 있고, 넓은 테이블이 있다. 그위에 여러 가지 보드게임이 놓여있고, 영어 교재도 올려져 있다. 작은 주방에는 따뜻한 식수가 콸콸 잘 나온다. 냉장고에는 맘대로 꺼내 마실 수 있는 주스와 우유도 있다. 복도에는 탁구대도 있다.
교실 배정을 하기 위해 영어 레벨 테스트를 한다. 총 50문항의 문제지가 내 앞에 놓였다. 사실 난 레벨 테스트가 필요 없다. 그냥 가장 낮은 레벨로 보내주면 될 텐데. 괜히 한 번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샘이다. 20분이 참 길다. 대학시절에는 시험지에 문제를 꽉꽉 채우고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오곤 했는데, 이 곳에서는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50문제 중 내가 답을 적은 것은 고작 열다섯 개다. 그나마도 몇 개는 틀렸겠지. 문제지를 제출하는 손이 부끄럽다. 괜찮다. 배우려고 왔으니까.
끝난 줄 알았더니. 논술형 문제지를 하나 더 준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다. 네 개의 그림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서술해야 한다. 주어, 동사, 목적어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을 네 줄 적었다. 내 앞에서 같이 문제를 풀고 있는 한국인 친구는 줄줄이 많이도 적었다. 내가 받은 그림은 네 개인데 저 친구가 받은 그림은 열네 개인가 보다.
마지막 관문은 1 대 1 말하기, 듣기 테스트이다. 선생님들 중 가장 대장인 필립과 마주 앉았다. 하얗게 치아가 드러나게 웃으며, 내게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내 표정만 보고 그는 이미 내 영어실력을 다 알아챈 것 같다. 천천히 또박또박 내가 알아듣기 쉽게 필립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3개월 뒤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을 거야" 당연히 나는 레벨이 가장 낮은 반으로 배정받았다.
'더 낮은 레벨은 없나요'
홈스테이 메이트 모하메드와 같은 반이 되었다. 내가? 모하메드와? 모하메드는 영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였다. 나의 기준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가장 낮은 레벨에 있으면, 내가 갈 곳은 어디지. 유쾌고 예쁜 선생님 조조와 나를 포함에 이 반에는 총 7명의 학생이 있다. 대부분 아시아 국가의 친구들이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다들 높은 레벨인 옆 반에 있다. 나도 유럽 친구들이 있는 옆반으로 레벨업을 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다.
일본인 학생 중에는 세 아이의 엄마도 있다. 세 아이, 세 아이인 줄 알았는데 세 어른이다. 첫아들이 마흔이 넘었다고 했으니, 루미코는 몇 살이지. 루미코가 40대라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40대 아들이 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10년 이상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왔단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루미코를 통해 여실히 느낀다.
어리둥절 혼이 빠진 뉴질랜드 어학연수 첫 주, 매 수업 넋이 나갔다. 영어를 배운다는 표현보다 귓구멍에 영어를 때려 박고, 익숙해지는 한 주이다. 꾸역꾸역 영어에 나를 처박는다. 무릎이 까질 즈음 두발로 서고, 두 발로 서고 나면 이내 걸을 것이다. 걷기 시작하면 곧 뛸 테고, 그즈음이면 친구들과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
'너무 이른 첫 번째 헤어짐'
나의 첫 번째 영어 선생님 조조가 떠난다. 고작 5일 만에 찾아온 뉴질랜드에서의 첫 번째 헤어짐이다. 다른 친구들과 조조는 꽤나 오랜 시간을 지낸 듯한데 나는 고작 5일이 되었다. 너무 아쉬운데 함께 아쉬워해도 되는 건가. 내가 정들기에는 좀 이상한가. 친절하고, 상냥한 선생님 조조. 그동안 한국에서 경험했던 '선생님'과 너무 달라서 그랬을까. 마치 동갑내기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다. 무엇이든 처음이란 진하기 마련이다. 뉴질랜드의 첫 주, 첫 선생님이 기억에 짙게 남는다.
친구들 모두 잔뜩 아쉬움을 표현한다. 나도 이렇게 아쉬운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들은 오죽할까. 교재 한 권을 모두 끝냈다며, 조조와 친구들이 박수를 친다. 나는 이제 첫 장을 넘겼는데 말이다. 조조가 친구들을 한 사람씩 안아준다. 모두들 꼭 끌어안고 아쉬움을 전한다. 사실 나는 좀 어색했다. 조조가 가르쳤던 많은 학생들 중 'Lee'라는 한국인 학생이 기억될까.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분명 그들이 가진 공감이 내게 닿기에는 멀다. 하지만 내게는 밝고 친절했던 첫 뉴질랜드 선생님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조조 선생님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