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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근 Jan 24. 2021

시드니에서 돌아오다.

#프롤로그, 호주 워킹홀리데이

1년을 채우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1년을 꽉 채울 생각이 없었기도 했고, 한 달 정도는 뉴질랜드 트레킹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시드니 생활을 마감하고 예정대로 뉴질랜드 트레킹을 위해 퀸스타운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퀸스타운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모든 트레킹 일정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은 남는다. 내가 서른 하나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단 하나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구구절절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왔다. 2년 전 뉴질랜드 생활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던 호주 생활, 아니 시드니 생활이었다. 과정은 달랐으나 다행히 좋은 기억이란 것은 같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1년이 다양한 경험과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졌다면, 10개월의 시드니 생활은 뭐랄까. 10개월 내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의 내 그릇을 깨달았다. 내면이 자랐다고나 할까. 나를 조금 철들게 해 줬다고 하자.



여전히 내 나이는 스물여덟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왜 '스물여덟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때 나 지금이나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다. '어떻게 내 나이는 벌써 이만큼이나 되었지' 아직도 착각 빠져있다. 대여섯 살 어린 동생들을 보며, 여전히 내 또래라고 착각한다. 그만큼 나의 정신연령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다. 어색하기 그지없다. 철이 없다.


한 1년,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으로 가득했다. 나는 분명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데, 모든 것들이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수년 동안 야무지게 다듬어왔던 SNS는 나를 아주 성실하고, 뭐든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SNS를 통해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나란 사람이 참 대단한 녀석일 줄 착각하고 칭찬만 했다. 그것에 힘입어 나는 나 스스로가 정말 성실하고,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계속 이렇게만 하면 난 뭘 해도 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SNS에 비쳤던 그 짧은 순간들을 빼고 나면, 나의 20대는 정말 부끄러울만치 게을렀고, 모든 것이 자기 합리화였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서른 하나,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깨달았다.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했다. 그렇게 말한다. 사실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고, 도망치듯 호주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가져와야 할 결과물과 계획은 명확했다. 마지막 출근을 했던 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고, 한 달 뒤, 시드니에 도착했다. 다양한 경험을 바라지도 않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생각도 없었다. 이미 뉴질랜드에서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빨리 정착해서 딱 내가 필요한 것만 가져가겠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처음 한 달 동안 호텔방을 청소했다. 이어 시드니의 한인 식당에서 주방보조를 시작을 했다. 요리하는 동생들을 도우며, 묵묵히 일했다.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뭔가 부탁하기 불편하지 않을까. 동생들이 내게 허드렛일을 부탁할 일이 생기기 전에 알아서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손재주는 있는 편이고, 일하는 손도 빨랐다. 1개월, 3개월, 5개월 시간이 지날수록 설거지통에 붙어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직접 불 앞에서 조리를 하는 일을 제외하면, 주방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짧은 시간 안에 칼도 제법 잘 다뤘고, 칼을 사용해야 하는 작업은 대부분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지만 주방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움직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적인 흐름도 보이기 시작했다. 종종 인간적인 갈등 사이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도 음식점의 운영에 대하서도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동드릴이나 연장을 들고 기물을 고치기도 했다. 사다리를 타고 천장 속으로 들어가, 수리 업체 직원과 통화를 하며 작동하지 않는 에어컨을 고치기도 했다. 활동량이 많은 일임에도 저녁 10시 퇴근 길이 지치지 않았다. 늦은 밤 2시간의 여가시간이 남아 있다는 게 좋았다. 하루, 이틀 주어지는 휴일이 행복했다. 욕심을 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충분히 현재의 생활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다. 나는 가진 것도, 잘난 것도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다. 급여는 가장 적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조금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면, 내가 조금 더 빨리 움직이고, 더 하려 노력했다. 그것에 대하여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사람을 얻는 것이고, 그래도 그게 옳은 것이라는 신념은 있었다. 골을 넣는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형으로서, 오빠로서, 한 직원으로서 경기장을 넓게 볼 줄 아는 든든한 센터 백 정도는 충분히 해줬던 것 같다.



시드니를 떠날 때가 되어서는 사장님도 내가 다시 돌아오길 바랐다. 시드니로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내가 리더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즈음, 한국의 이전 직장에서도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다.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내가 큰 의미였던 것은, 직접적으로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다. '나도 나 스스로 이런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일깨워 줬다는 것에 있다.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으로 자책하듯 시드니로 왔으나,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것들 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다시 시작하기 위한 충분한 열정과 자신감을 찾아서 돌아온 듯싶다.



서른하나의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잘 한 선택이었다. 분명 글로 옮기지 않은 괴로움과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덮을 만큼 잘 한 선택이었다. 시간이 길지 않았다. 도대체 그 시간들이 어떻게 지나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가올 미래의 10개월을 생각하면, 길고도 긴 시간인데, 흘러간 과거의 10개월을 생각하면, 짧아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뉴질랜드가 그리운 만큼 시드니가 그리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뉴질랜드만큼이나 시드니도 그립다. 이 또한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차근차근 받아들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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