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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근 Sep 01. 2022

나를 반기지 않던 인버카길

Episode.01 인버카길


블레넘에서 크라이스트 처치까지 하루, 다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더니든을 지나 인버카길까지 하루, 이틀 동안 버스만 열다섯 시간을 달렸다. 어둠이 내린 인버카길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일기 예보를 확인했던 터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기대는 하고 있었다. 궂은 날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판초 우의를 꺼내 몸과 배낭을 덮었다. 빗 줄기는 가늘지만 바람이 만만치가 않다. 비와 바람이 뒤섞여 바람이 내리는 건지, 빗 물이 날리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다. 아직 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판초 우의 가 덮지 못한 내 바지 밑단과 신발은 이미 촉촉해져 버렸다.



마트에 들러 닭다리 팩과 사과 두 개를 샀다. 돈은 여행할 때 귀족같이 써야 하는데, 지금까지 몇 번 없었던 내 여행이 그랬듯, 여행만 시작되면 헝그리 정신이 나를 지배한다. 이 동네는 내가 반갑지 않았나. 잠시 마트에 들렀다 나온 10분 사이에 가늘었던 비가 바람에는 휘날리지도 않을 만큼 굵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있다. 길게 한 번 한숨을 내  쉬었다. 한 번 더 담담하게 판초 우의를 가다듬었다. 감추지 못한 찌푸린 얼굴과 함께 빗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휴대폰의 배터리는 5% 남짓, 인터넷 지도를 따라 예약해둔 백패커를 찾아 들어갔다. 허겁지겁 급하게 여기 다 싶어 문을 열었더니, 웬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백패커스가 아니라 일반 가정집이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이해한다. 너무 미안했다. 평화로운 저녁,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웬 동양인이 하얀 판초 우의를 쓰고 내 집 문을 불쑥 열었다. 그리곤 대뜸 "여기 백패커스 맞나요?" 묻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들었다. 그녀는 "Shit"이라고 소리쳤다. 


이런 내 꼴이 참 불쌍하기도 했을 터,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휴대폰의 지도를 같이 들여다보며, 내가 가야 할 백패커스의 위치를 다시 알려줬다. 그렇게 다시 숙소를 찾아 빗속을 헤매었다. 백패커스를 찾았을 때의 그 허탈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모습의 간판이었다. 그 앞으로 다섯 번은 지나쳐 갔던 것 같다.


녹초가 된 몸으로 백패커스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처음 내게 던진 말은 "현금 있니? 카드 결제는 안되는데"였다. 그 말은 즉, 일단 배낭을 풀고, 어서 이 빗속을 헤치고 현금인출기를 찾아 현금을 뽑아 오라는 말과 같았다. 간단하게 짐만 풀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이곳에 올 때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포르투갈 여자가 이미 같은 방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와 같은 버스에서 같은 시간에 내렸을 텐데, 그녀의 모습은 이미 이 방의 터줏대감이다. 아무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해보니 10개월 동안 포르투갈인은 처음 만나 보았다. 그녀는 친절했다. 휴대폰을 충전해야 할 콘센트를 혼자 독점하고 있는 것 빼고 말이다.


삐거덕 거리는 2층 침대의 두툼한 이불이 너무 아늑하다. 오랜만에 노곤하게 쌓인 피로가 몸과 마음이 더욱 포근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인버카길은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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