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차생활의 시작은 지갑으로부터
저는 취미가 많은 편입니다. 요리, 베이킹, 독서, 게임, 아이돌 덕질 등 남들이 취미라고 말할 법한 것들을 두루두루 섭렵해 왔는데요. 공통점이 있다면 푹 빠져서 하기보다는 가성비로, 짧고 얕게,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즐긴다는 것입니다. 뭐, 어디 가서 스몰토크로 어떤 주제가 나와도 맞장구는 쳐 줄 수 있을 정도는 돼요.
그러던 제게 꽤 큰 소비를 하면서, 길고 깊게,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바로 차(tea)입니다. 어느 로맨틱코미디 클리셰처럼 벙찐 표정으로 '이런 취미는 <차>가 처음이야!'라고 외치고 있는 저. 지금부터 차에 대해 그리고 차에 스며든 저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해 볼게요.
내 지갑을 열게 한 취미, 차(茶)
어린 시절 유복하지 못해서 특별히 용돈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렇다 보니 준비물, 문제집과 같이 꼭 필요한 것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는데요. 갖고 싶은 무언가를 용돈을 모아 사본 경험이 없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가져본 경험도 거의 없어서 그런지 20대 중반까지도 돈을 '잘' 못쓰는 편이었어요.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돈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취미 생활을 해도 최대한 가성비로 하게 되었어요.
근데 <차>는 조금 달랐어요. 제가 지갑을 열었고, 카드를 긁었거든요.
처음 차를 마시게 된 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커피를 못 마셔서'였어요. 카페인에 예민한 타입이라 커피만 마시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배도 아프고, 정신이 붕 뜬 기분이 들고, 밤에 잠도 못 자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차'를 찾게 되었어요.
여기서 잠깐 오해를 막기 위해 차 오타쿠로서 구구절절 설명해 보자면, '차'에는 카페인이 있고요, 보통 알고 있는 차들이 전부 '차'는 아니에요.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요, 허브차(페퍼민트, 캐모마일 등)나 곡물차(보리차, 둥굴레차), 꽃차(국화차, 매화차) 등은 엄밀히 말하면 '차'가 아니랍니다. 이들은 '대용차'로 분류되며, 카페인이 없어요.
실제로 '차'는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만을 뜻하며, 백차, 황차, 녹차, 홍차, 청차(우롱차), 흑차(보이차가 흑차에 속함)로 분류됩니다. 이를 6대 다류라고 하는데요. 이 진짜 '차'는 모두 카페인이 있어요. 다만 테아닌이라는 성분이 함께 들어 있는데, 테아닌이 카페인 흡수를 막고 배출을 돕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카페인이 있지만 커피보다 흡수가 적고 배출이 빨라, 카페인으로 인한 불편감은 적다고 볼 수 있답니다.
아무튼 과거의 저는 허브차도 홍차도 녹차도 다 같은 차라고 생각했고, 카페인이 들어있을 거라 생각도 못한 채 카페를 가면 자연스럽게 차를 주문했어요. 그러던 중 일본의 차 브랜드인 '루피시아'의 가향 홍차를 알게 되었고, 그 향긋한 신세계에 빠지게 되었어요.
여기서 또 차 오타쿠적 모먼트를 뽐내보자면요, 가향 홍차는 홍차에 향을 넣거나, 향이 나는 재료(꽃잎, 열매 등)를 함께 넣어 섞어 만들어요. 상큼한 과일 향이 나기도 하고 달콤한 꽃 향이 나기도 해요. 특히 루피시아의 사쿠람보, 캐롤 등의 가향 홍차는 차를 모르는 이들에게 내어주면 매번 감탄할 정도랍니다.
그리고 홍차를 마시다 보니 저도 모르게 로맨틱판타지 소설 영애에 대한 동경이 생겼는지(정작 로판 소설은 보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애프터눈 티세트'와 '서양식 홍차 티팟과 찻잔'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어요. 애프터눈 티세트 1인 비용은 대략 2만 원대였는데 두세 번 갔을 정도니 그 당시 제 기준에는 '과소비'였어요.
물론 고작 애프터눈 티세트 몇 번 먹은 걸로 저에게 <차>가 과소비 취미일리는 없죠. 진짜는 30대, 결혼까지 하고 이래저래 삶이 안정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난 <차>에서 시작됩니다.
20대 때 다니던 회사의 상사가 보이차에 푹 빠져 다예사(차 전문가)가 되셨어요. 어떻게 연이 다시 닿아 인사도 할 겸 보이차 원데이클래스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이 날 처음으로 '차나무 잎'으로 만드는 차만이 '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같은 차나무 잎으로 만드는데, 어떻게 다 다른 맛을 내지?'라며 차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차의 맛뿐만 아니라 차를 우리는 행위 자체가, 함께 모인 찻자리가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더라고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저는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상태로 나는 집에 오게 되었고 바로 보이차 정규 클래스를 듣기로 결심했어요.
보이차 정규 클래스는 6회 과정으로 회당 금액이 적지 않았어요. 게다가 보이차를 우리는 다관(찻주전자)인 자사호까지 구매해야 했어요. 참고로 자사호는 중국 이싱 지역에서 나는 독특한 흙인 자사토로 만든 다관인데, 우리나라 옹기처럼 숨을 쉬는 것이 특징이에요. 제가 당시 구매한 자사호는 입문용이지만 십만 원이 훌쩍 넘었으며, 함께 산 보이차야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제 기준 비쌌어요. 이후에 따로 찻잔과 숙우(우려낸 차를 부어두는 용기)까지 샀으니 큰 금액을 처음으로 취미에 쓰게 된 거죠.
저의 과소비(?)는 시작일 뿐 이후에도 계속되었어요. 차수업도 몇 번 더 듣고요. 티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미'로 딴다며 제 기준 정말 큰 금액을 지출했어요. 요즘은 차나 다구를 큰 고민 없이 턱턱 사는 건 일상이 되었어요. 오로지 차 경험을 위해 우리나라 차의 고장인 하동 여행까지 몇 번 다녀오고, 얼마 전에는 대만까지 가서 찻집 투어를 하고 왔답니다.
도대체 이 차는 굳게 닫힌 제 지갑을 어떻게 열었을까요? 그 매력을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