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교수의 축사, 그리고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최근 본격적으로 인스타를 시작했다. 그전에는 인스타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그 안의 컨텐츠도 잘 보지 않았다. 네모난 조그만 창 안에 휙휙 돌아가는 릴스,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스타를 시작하면서 예전에 회사 프로젝트 관련해서 썼었던 슬로건을 절감하고 있다. 그 슬로건은 '개인의 세계'였다.
막상 그 슬로건을 썼을 때에는 개인의 세계라고 말만 했지, 피상적으로만 생각했었다. 요즘은 개인 채널들도 많고, 각 디지털서비스도 개인맞춤화되고 있으니 '개인의 세계'가 맞지, 이러면서. 그런데 실제로 인스타툰을 시작해보니 정말 그 안에 개인의 세계가 있었다. 매일매일 아이의 구구단 숙제가 자신의 과제가 되는 전업주부의 삶이 있었고, 더 이상 소개팅 하는 것을 포기하고 솔로의 삶을 선언한 사람도 있었고, 아이와 직장생활에서 아슬아슬하게 왔다갔다 하는 워킹맘의 삶도 있었다.
모두가 그 순간 자기 인생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데도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업주부능 자신의 경력을 잇지 못한데서 오는 아쉬움, 솔로는 과연 이대로 혼자로도 괜찮을까라는 의심, 워킹맘은 아이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이게 맞을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을까? 최선일까? 이런 질문들이 사람들의 컨텐츠 속에 보였다. 사람이라면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어찌할 수 없는 불안, 외로움. 그것은 나의 세계를 오직 나만히 보고 만들어가고 있으며 순간 순간 수많은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버려진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졸업축사는 그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대략 80년을 산다고 가장하면 3만일 가까운 아주 많은 날들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중의 대부분의 날들은 잊어버리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날 무엇을 했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잊혀지게 된다. 놀라운 것은 잊어버렸을 때, 비로소 내가 나로부터 타인이 되었을 때, 나 스스로에게 무척 관대해진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쓴 글이나 그림을 보고 꽤 잘 쓰고 잘 그렸는데? 하고 놀랄 때가 있다. 당시에는 어떻게 봐도 부족해보이고, 왜 1분1초를 더 알차게 쓰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비난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1분 1초 나를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몇년에 몇분 정도 들여다보는 타인은 그래서 얼마나 훌륭하고 문제없어 보이는가.
'엄격해지기 쉬운 나 스스로에게 좀더 친절하고, 타인도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는, 어쩌면 나였을 수도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라. 친절하라'. 라고허준이 교수는 말하고 있다.
에브리띵에브리웨어올앳원스는 허준이 교수의 친절한 생각을 엉뚱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나를 타인처럼 여기고, 타인을 나처럼 여기며 친절하라 - 이 주제를 한큐에 풀어낼 수 있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통해서 영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엉뚱하고 오색찬란한 비주얼때문에 얼핏 B급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의 속 알맹이가 너무 고귀해서 심지어 신의 말씀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마음 속 어찌할 수 없는 불안, 죄책감 - 혼돈의 베이글 - 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가지 '친절하라.' '나자신과 타인에게‘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 에브리띵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아빠의 대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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