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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 PD Jun 29. 2022

을지로가 특별한 이유는 낡은 간판 때문일까

재해석  / 220629 을지로 퇴근길




 

밤 11시, 퇴근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누가 올라오나, 이 시간에? 건물은 텅 비어있을 시간인데.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이내 깨닫는다. 아, 빗소리구나. 작고 낡은 건물에는 처마가 하나 있다. 딱, 딱, 딱. 비 오는 날이면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규칙적인 소리를 낸다. 어쩌면 건물 옆 구석에 세워둔 뭔가에 물이 부딪는 소리일 수도. 소리의 근원을 깨닫고 나니, 조금 전까지 발걸음 소리라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빗소리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처마에 달아둔 전구는 꺼진 지 오래다. 2시간 전, 출근할 때만 해도 불빛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는데. 

 

 조용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어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오히려 누군가 있었으면 더 무서웠을 것 같다. 건물을 나올 때만 해도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차가움을 느끼는 면적이 늘어난다. 큰 길가까지 나왔을 때는 우산을 써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우산을 꺼내려 가방 안에 손을 넣었으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각에 홀린 듯 그 물건을 꺼내버리고 말았다. 손톱을 세워 오돌토돌한 초점 링을 괜히 한번 슥, 긁어본다. 무엇을 찍을지도 정하지 않은 채 렌즈캡을 빼내고, 카메라를 켰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찻길에 초점을 맞췄다. 사진도 좋지만, 비 오는 날에는 역시 영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영상을 찍을 거면서.  



 한 장면을 오래 찍지 못한다. 계속 찍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렌즈를 돌려 줌인을 했다가, 그걸로도 부족해 쪼그려 앉았다. 모자를 쓰지 않고 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옷이 젖는 것보다 머리가 젖는 게 훨씬 더 잘 느껴지 않을까? 그러면 금방 카메라를 넣고 우산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톡, 톡. 빗방울이 떨어지며 작은 물웅덩이에 파문이 이는 것을 찍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카메라에 잘 담기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들었다. 비 오는 날 물 입자에 반사된 헤드라이트 빛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빛기둥 두 개는 인도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영상을 계속 돌려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들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빗길에 젖은 타이어가 지나가며 내는 소리. 점점 커졌다가 금방 멀어져 가는 생생한 소리. 역시, 영상을 찍어야 하는 이유다. 마이크를 사서 단다면 소리가 참 예쁘게 담기지 않았을까 싶지만 짐이 늘어날수록 카메라를 챙겨 다니지 않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당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장면, 찍고 싶은 장면에 렌즈를 겨누고 욕심껏 프레임 안에 가두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난 이걸 왜 찍고 있을까. 찍는 기준이 뭘까. 오전에 유튜버 감송필름님의 영상을 봤는데, 내가 담고 싶은 것들을 담다 보면 어느새 공통점이 발견될 거라 하셨다. 카메라를 사고 영상을 찍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째지만, 난 아직 잘 모르겠다. 그냥 예쁠 것 같으면 담는 건데.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쓰레기봉투가 쌓여있는 곳까지 오리걸음으로 향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면 나 지금 쓰레기봉투도 예뻐서 찍는 건가. 정확히는 흰 비닐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모습이 예뻤고, 소리가 듣기 좋았고, 멀리서 볼 땐 고작 쓰레기 더미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찍으니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 좋았다. 


 

 뒷목이 바짝 조여졌다. 오늘 내내 뻐근했던 왼쪽 어깨가 당긴다. 모자챙 아래로 와락 밀어닥친 장면이 예쁘다. 렌즈와 눈에 정면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고개를 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희뿌옇게 번지는 가로등 빛과 보케 효과를 얹은 것처럼 가로등 주위를 어른대는 원. 맞지 않는 초점. 시야가 흐릿한 게 내 속눈썹에 얹어진 빗방울 때문인지, 렌즈를 덮은 빗방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카메라마저도.


 처음 카메라를 사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을 땐, 흔들리는 손이 무척이나 싫었다. 좀 더 안정적으로 찍고 싶었는데 찍을 때는 괜찮더라도 집에 가서 확인해보면 미친 듯이 흔들흔들. 편집을 하면서 흔들림 보정 효과를 계속 넣어보기도 했고, 짐벌을 써보기도 했고, 다른 물체 위에 카메라를 올려두기도 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흔들리는 화면 자체가 그 나름대로의 매력으로 느껴졌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한 편의 예쁜 영화 같은, 에디터 기은님의 영상을 보고 나서부터였나? 어쨌든 그 이후로 무리해서 삼각대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물론 카메라를 고정하고 찍었을 때 더 예쁜 장면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을지로 퇴근길이 특별했던 이유는 뭘까. 카메라를 가져가서? 비가 와서? 아니면 찍어뒀던 영상을 보며 뭐라도 써보겠다고 스쳐간 감각과 기억을 치열하게 붙잡아 언어로 담아내려는 지금의 노력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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