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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군 Mar 30. 2017

그녀의 목소리

OutTake #02.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주파수와 주파수 사이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 놓인 시간을 달달하게 녹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매일 밤, 그 목소리를 찾아 동그란 모양의 다이얼을 돌리곤 했다. 지지직하는 잡음 사이로 희미하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미세하게 다이얼을 맞춘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늦은 밤, 가로등 불빛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은임이었다. 새벽 세 시, mark knopfler의 시그널이 흐르면 갈 길 잃은 세상의 이야기들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스크린 속 현실을 이야기하고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거침없었던 목소리. 삶의 구석구석에 놓인 외로움에 손을 내밀며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위로해주던 속삭임. 

 라디오에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고3이라는 얄팍한 이유였다. 정치면과 사회면을 오가는 이야기로 가득 찼던 프로그램은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 무렵, 그녀가 진행하던 <FM 영화음악>도 폐지되었다. 뒤늦게 그녀의 영화 같은 삶을 접했다.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 라디오에서 팟캐스트로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 시절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여전히 가슴 아픈 건,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노동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외롭다. 삶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현실을 곧 잘 외면한다. 

 라디오는 일상이다. 매일매일 사람을 만난다.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없다. 필연적으로 현실을 비춘다. 사람들로 가득 찬 출근길 지하철부터 깜빡 잊고 지나친 아빠의 생신, 직장 내 부당함을 토로하는 사연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바라보든 다양한 시선들이 모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축하와 응원이 쌓인다. 아픔과 기쁨을 나눈다. 

 늦은 밤, 하루에 떠밀린 사람들 매일 친구와 기울이는 소주 한잔처럼, 때론 희망이 때론 위로가 되어 주는 목소리. 떨리고 작은 울림이지만 외면하지 않고 먼저 손 내미는 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 그녀는 홀로 그 공간을 지켰다. ‘나', ‘너’와 같은 개인의 고민을 ‘우리’의 것으로 바꿔내던,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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