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08. <4등>, 불편한 질문들
보기 불편한 영화들이 있다. 마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이 그랬고,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랬다. <하얀 리본>의 경우, 꽉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회초리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만들어낸 폭력의 이미지는 오히려 더 선명했고 그 잔상은 오랫동안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다. 이따금 떠올라서는 있는 힘껏 나를 불편함 끝자락에 몰아넣고 사라졌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그렇다. 케이티가 물품 배급소에서 허겁지겁 토마토소스를 집어 먹던 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수 차례 리와인드됐다.
<4등>도 내겐 그런 영화다. 준호와 기호를 다그치는 정애의 모습이 불편했다. 앞의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서있는 세상의 폐부를 정확히 관통해서다. 그리고 하나 더 훨씬 익숙해서다. <하얀 리본>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모두 폭력을 언급한다. 전자는 체벌이라는 물리적 폭력, 후자는 제도의 폭력을 묘사한다. 두 폭력이 내게 다가오는 과정은 간접경험이다. 하지만 <4등>은 다르다. 직접 경험이다. 교육이란 이름의 물리적 폭력과 제도의 폭력, 둘 모두의 기억이 배어있다. 사교육 1번지 혹은 8 학군, 내가 자란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4등>의 주인공, 준호는 말 그대로 4등이다. 수영 대회에 나가서 언제나 4등만 한다. 준호의 엄마, 정애에게는 욕망이 있다. 준호가 메달을 따는 것. 이를 위해 가리는 게 없다. 매일 준호를 수영장에 내리고 태우고 오기를 반복한다. 수소문 끝에 실력 좋다는 코치를 준호에게 부쳐준다. 수영 코치, 광수는 준호를 훈련시킨다. 그 방법에는 체벌이 포함되어 있다. 기호의 말처럼 맞아서 성적이 오른 건지 준호는 대회에서 2등을 한다. 정애의 말을 빌리자면 ‘거의 1등’이다. 정애, 그러니까 엄마는 말한다. ‘나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라고.
수영을 대학 입시로 치환하면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그 한 구석에서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나의 이야기도 있다. 도곡역과 대치역 사이, 남부순환로 일대의 러시아워는 10시를 전후로 시작된다. 오후 10시, 학원이 끝마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맞춰 자신들의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의 갓 길 주차로 길이 좁아진다. 대치동뿐만 아니라 서초, 송파지역에서까지 몰려든다. 학원의 셔틀버스와 학부모들의 차량은 도로를 붉은빛으로 덮는다. 매일 밤 벌어지는 풍경이다.
차 안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상이었다. 대부분 햄버거나 김밥과 같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음식들이다. 몇몇 학생들은 편의점에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독서실로 향한다. 내신과 입시로 끊임없이 이러한 날들이 이어졌다. 불과 수년 전, 나의 일상이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밤 10시 이후에도 학원 문을 잠그고, 두꺼운 커튼을 치고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늘도 그렇다. 10시를 전후로 러시아워가 시작된다. 브레이크 등의 붉은빛으로 둘러 쌓인다. 욕망의 불빛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늦은 밤까지 힘겹게 붉게 빛을 내고 있을까.
체벌에 대한 기억도 있다. 영어 단어를 외워가지 않았던 고등학교 1학년, 다리를 창틀에 걸친 채 하키채로 맞아야 했다. 하키채가 영어성적을 올려주진 않았다. 준호도 그렇다. 준호는 몇 번이고 ‘때리지 않으면’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매’처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다. 그렇기에 준호의 1등은 상징적이다. 단순한 목표 달성이 아니라, 체벌=교육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준호를 1등으로 만든 건 본인의 의지였다. 감독은 레일을 걷어내고, 빛을 찾아 자유롭게 수영하는 준호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낸다. 이 장면을 통해, 준호의 목적은 1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과에 따라 줄 세워진다. 애써 부정해도 그게 현실이다.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가장 확실히 배우는 것, 그건 국어도 수학도 아닌 경쟁이라는 시스템이다. 그 시절, <말죽거리 잔혹사>의 OST인 ‘학교에서 배운 것’의 가사가 멋지게 들린 건 단순한 이유다. ‘타인과 날 끊임없이 비교해대는 법,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이라는 가사가 너무나도 교육 시스템의 현주소를 잘 대변해주고 있으니까.
난 편입을 했다. 여전히 관심사를 찾아 전공을 바꾸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정말 나에게 그게 다였을까? 더 평가가 좋은 대학교로 옮겨온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왔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전적대의 후배였다. 편입에 대해 물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위선적인 답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4등이어도 괜찮아’ 같은.
영화 <4등>의 또 다른 매력은 누구도 악인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체벌을 일삼는 코치 광수도, 광수에게 체벌을 학습하는 준호도, 이를 묵인하는 엄마 정애도, 방관하는 아빠 영훈도 저기만의 이유를 가지고 움직인다. 각각의 등장인물은 단순하게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 하나를 탓하는 건 쉽다. <4등>은 쉬운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문제에 가까이 다가간다. 교육 그리고 폭력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하나같이 쉽게 삼켜지지 않는 질문들이다.
그중 준호가 던지는 이 질문, “1등 하면 행복한가요?’는 답을 찾는데 조금 오래 걸릴 것 같다. 난 오히려 "1등 하면 기분이 어때요?'라고 묻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이 질문의 대한 답은 이러한 질문 자체를 지우는 날이 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위선적인 믿음이 오는 날이 있을까? 누구도 탓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 숨겨왔지만 들켜버린 위선을 마주한 불편함이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