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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기 #1

출발과 도착

by 도현

시작하기 전, 이 글은 여행 이후에 작성된 여행기이므로 당시의 사실이나 감정과는 조금 다를 수 있으며 여행을 곱씹으며 작성한 일종의 회고록에 가깝다는 것을 밝힌다.


잠을 나름 잘 잤던 것 같다. 설레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감정이 자기 직전 상태와 거의 동일하게 지속됐다. 전날 챙겨둔 짐을 마무리하고 리스트를 체크하고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새벽 6시의 올림픽대로는 벌써 사람이 많았다. 아빠는 길이 밀려서 출근을 일찍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새벽에 나를 데려다주는 아빠가 있다는 것도,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듬직한 차가 있다는 것도 너무 황송하다는 생각을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짝꿍(이하 형)을 만났다. 착장이 어땠더라. 흰색 이너 민소매에 바다뱀 같은 줄무늬 가디건을 입고 그 위에 멋들어진 가죽자켓을 입은 모습이었다. 나를 만날 때면(아닐 수도 있다) 항상 멋을 내곤 했는데 그날은 여행이라 그런지 더 멋지게 입은 것 같았다. 나 멋지지? 하고 입었을 옷이 정말로 멋져 보여서 사뭇 웃겼다. 여행은 처음이 아니지만 함께하는 여행이 처음인 우리, 우리는 그 처음이 아무렇지 않은 척 수화물을 처리하고 출국장을 벗어났다. 고백하자면 공항에서 내내 심장이 너무 열띄게 뛰었는데 형한테는 담배를 못 피워서 그런 것 같다고 했지만 사실 너무 설레서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긴장되거나 설레는 상태가 되면 항상 구역질이 났다. 그 경험을 정말 오랜만에 했다. 주로 발표를 하거나 학예회에서 공연을 하거나 하는 행위가 그랬는데 이 정도의 감각은 정말 이례적이었다.


내가 탑승 전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동안 형은 흡연실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나를 기다려줬다. 투명한 창 밖으로 보이는 형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예쁘다 잘생겼다 그런 거 아니고 정말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망상이긴 한데 저 사람을 큰 미술관 메인홀에 전시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생각해도 망상이군. 상관없다. 내 눈엔 어떤 메인홀 전시보다 아름다우니까. (갑자기 든 생각인데 형이 이 글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직 여행기를 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해도 되려나. 어차피 형 의식해서 쓴 거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주길.)


비행에서의 기억은 음, 손을 잡았고 서로에게 기대었고 서로를 바라봤다. 눈앞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인이 옆에 앉아있는데 나는 다른 승객들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몰래 손을 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 대한민국의 현실이 조금은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때의 내 마음을 시각화할 수 있다면, 동성애를 혐오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에게 계속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떻게 죄악일 수 있을까. 솔직히 사랑도 마음껏 하지 못하는 내가, 세상이 조금 미웠다. 근데 또 고작 손 좀 잡았다고 설레서 미치겠는 내가 좀 웃겼다.


우리의 비행은 아주 짧게 끝났다. 정상 고도에 올라가자마자 밥을 주더니 밥을 먹고 조금 지나니 착륙준비를 하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해본 수많은 단/장거리 비행에 의하면 나 같은 경우엔 비행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비행기 안에선 깨어있어도 깬 상태가 아니고 자도 자는 게 아닌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이렇게 짧게 갈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니. 형을 보고 웃어봤다. 형은 내가 애 같다고 말했다. 형한테도 얘기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호들갑 떠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마음이 요동칠 때만 신나 한다. 근데 너무 신이 났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지만.(이유는 다음 글에서 공개)


이 글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짐정리만 하고 침대 위에서 썼다. 이 감정과 감각들이 휘발되기 전에 적고 싶어서. 그래서 매일 적어볼 생각이다. 아마 꽤 긴 분량이 되겠지. 4일짜리 짧은 여행이었지만 내가 느끼고 온 것들은 거의 1년 치의 경험과 기억이다. 한 동료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빛나는 순간들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아무래도 이 여행에 대한 기억으로 한 달, 1년,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내 삶의 찬란함을 떠올릴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을 열심히 모으며 살아가야지. 나는 내 삶이 너무나 기대되고 궁금하다. 삶을 여행하듯 살고 싶다고 말했었지. 매일 밤마다 다음 날이 기대됐다. 매일 내일이 기대되는 삶은 얼마나 찬란할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여행하듯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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