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타기인생 Jan 24. 2020

01. 한심한 사람.

아버지와 조울증

 "니네 아빠가 바뀌었어"  

 2019년 8월 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랑 크게 싸웠다는 이야기였다. 엄마랑 나는 서로 상황을 자주 공유하고 하루에 한시간씩 통화를 하는 친구였기에 이런 이야기는 특이한 건 아니었다. 아빠는 고집이 너무 강해서 엄마를 자주 힘들게 했다. 근데 이번의 싸움이 독특했던 것은 엄마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말 다 솔직히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대해서 아빠가 깊은 후회와 함께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고. 그 뒤로 너무나 엄마 말을 잘 들어주고 순응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엄마는 살짝 기뻐했다. 

 엄마가 기뻐했던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알려면 아빠의 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50년대에 태어난 남자. 그때의 남자들이 다 그렇듯이 자기 고집이 강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꼰대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를 나와 자부심이 엄청 강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그다지 많은 애정을 받지 못했다. 형제자매는 10명 가까이 있으나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 따뜻한 가정환경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할머니는 강팍하고 히스테리컬한 성격이었고. 할아버지는 무능력한 인텔리여서 평생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광주로 나와서 하숙을 했다고 했다. 순응적이고 매사 진지한 모범생 타입이다.

 자신이 그런 환경에서 커서인지 나에 대해서도 항상 엄격한 편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비상식적인 행동도 많았다. 방 정리를 안했다고 기합주고 체벌을 가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게 극대화 됐을때는 겨울에 팬티만 입혀서 쫒아낸 적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화를 어떻게 다룰 줄 몰라서 어린 자식에게 푼 것일테다.

 모두가 이걸 읽으며 생각할 것이다. '아저씨들이 참 다 그렇지'  근데 이 사람이 동년배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이런 성격이 종교를 만나서 더 편협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우울하고 살기 힘든 집안에 태어나, 생각도 많고 (자기 딴에는) 고생도 많이 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40대 어느날 불교를 만난 순간,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절을 다니는 것도, 스승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혼자 불교를 파기 시작하더니 정말 깊게 빠졌다.

 이후 고기도 끊고 작년까지 20년 가까이 채식생활을 고집했으며 엄마와 나에게 불교 교리를 계속해서 설파하고 강제했다. 학대를 한 것은 아니나 불교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언행을 보이면 눈치를 많이 줬다. 헛기침, 심기 불편하다는 표정, 장광설. 그런 변화와 겹쳐져, 아빠가 회사생활을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왔다. 그의 나이가 불과 40대 후반일때다. 기존 다니던 직장을 떠나, 선배가 차린 회사로 들어갔는데 문제가 많았다. 창업자인 학교 선배는 무책임한 사람이었고 아빠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많이 힘들어했고 더 괴팍해졌다. 그래서 나도 엄마도 일이나 공부를 핑계로 계속 밖에 나가 있었다.

 그러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2002년, 서울 생활을 접기로 결정했다. 회사가 망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니 덤태기를 쓰기 전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퇴직금을 포함한 보상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나를 자취생으로 놓아두고서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어느 정도로 깊은가 하면, 지금도 강릉까지 KTX를 타고 간 다음. 버스를 타고 한번 들어간 다음. 다시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대략 4~5시간 정도가 걸린다.

 엄마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택한 고립된 환경에서 불교를 믿는 마음은 더 깊어졌고, 자신에 대한 기준과 타인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해져갔다. 아마 스승이 있었다면 다를 것이다. 하다못해 법륜같은 사람이라도 쫒아다녔다면 이 정도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어느 정도면 괴팍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모습들은 어떨까? 명절에 한 두번 보면 부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며 1시간 넘게 장광설을 펼친다. 아들이 읽는 책들에 대해 진리가 아니라고 비웃는다. 1년에 3~4번 보는 하나뿐인 자식에게 경전을 외워오라고 하도 압박해서 명절에 아예 자식이 내려오지 않았다. 세상 만사를 모두 불교적으로만 해석한다. 그 수준이 성경 무오론자들 수준이다. 경상도가 잘 사는건 절이 많고 불교를 숭상해서다. (참고로 그는 광주 사람이고 민주당 지지자다) 염불을 외우고 물을 마시면 몸에 도움이 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박근혜는 그래도 육영수 여사가 불교를 믿었으니 통치를 잘 할것이며, 문재인은 카톨릭을 믿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 정도면 괴팍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런 자기의 장광설과 강조가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가 진리를 알게 됐는데 이것을 가족에게 알려주는 것이 사랑 아니겠냐고. 그때는 이 모든 게 그저 이봉석이라는 사람의 편협하고 한심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그의 괴팍함 중 기질과 성격이 차지하는 일정 비율이 있을 것이다. 우울증과 우울한 기질이 다른 것 처럼...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병증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금새 체념하게 된다. 그때 알았다 한들 어쩌겠는가? 50대의 팔팔한 중년 꼰대에게 '당신은 지금 정신병이예요' 라고 말하고 병원에 끌고 갈 방법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백번 양보해서 그런 헛소리들 정도야 괜찮다. 문제는 자신과 평생을 사는 반려자에 대한 태도였다. 엄마랑 같이 일을 하다가 엄마가 다치면 고기를 아직 못끊어서 그런 거라며 훈계하고, 맨날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집안일 한번을 도와본적이 없다.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은 적도. 휴지통에 쓰레기를 버린 적도 없다. 옷을 사주면 흙때 기름때를 잔뜩 묻히고 오고 휴지를 제대로 써본적도 없다. 엄마가 다쳐서 손에 붕대를 감고 있어도 몇주가 되도록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손이 빠르거나 눈치가 좋아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공사,농사,살림. 모두 다 엄마가 훨씬 실력이 좋다. 입맛은 또 까다로워서 채식이라 해도 아무거나 먹질 않는다. 깊은 산속에서 엄마는 전주사람의 입맛과 손맛을 최대한 발휘해, 오직 풀때기만으로만 밥을 20년 가까이 지어야 했다. 어쩌다 엄마가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티를 내면, 눈치를 참 많이 줬다.


 그렇다고 자신이 뭔가를 좋아하거나, 삶에 유머감각 같은걸 감추고 있는 사람이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타인이 농담 한마디를 하면 경박한 사람이었다고 기분이 상해 하루종일 표정이 어둡다. 엄마와 내가 농담을 주고받으면 그건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타박을 준다. 엄마쪽 집안과, 나는 선천적으로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빠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다 갖추진 못했지만 엄마쪽은 정말로 흥겹고 유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과 한 가족을 이루고 살아온 것이다.아직도 내게는 이 결혼이 최대의 미스테리다.

  정리하자면 그는 가족도 도저히 정을 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나름 젠틀하고, 똑똑하고, 말을 말 같이 하는 능력은 있다. 그러나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박힌 게 없었다. 경제능력이 그렇다고 좋았던 것도 아니다. 자신의 월급을 제대로 갖다줘본 적도 없다. 항상 엄마가 집안을 먹여살렸다.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고 살던 사람이 엄마의 지적을 받고 깊게 후회하고 바뀌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앞으로 우리 식구는 걱정이 없겠구나. 엄마가 아빠를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앞으로 남은 두분의 인생 최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부분이 해결됐다. 정말 좋은 일이지. 두 분 연금도 나오고, 집도 이제 자리 잡았고, 농사일도 소일거리 삼아 조금씩 해서 수익성 높은 작물만 지인들에게 팔아서 돈을 만들고 있으니 그냥 두 분 잘 살고 나도 내 인생을 잘 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랑 이야기를 나눈지 얼마 안되서 엄마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아빠가 무기력하고, 말이 없어지고, 잠을 못자고 두통과 복통을 계속 호소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곧 죽을 거 같다는 공포에도 시달린다고 했다. 


 아빠는 원래 두통이 몹시 심한 사람이었다. 아스피린을 읍내 약국에서 열통을 넘게 사서 달고 살았다. 그 통증이 너무 심해져, 추석이 다가오기 전 응급실을 세번이나 갔다왔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엄마와 내 걱정이 늘어가던 중, 문득 우리 둘은 아빠가 어쩌면 우울증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했다. 내가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경험에 비추어 생각을 해보니 아빠가 정말로 우울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 말수 없어짐, 불면증, 두통...강릉에 있는 정신과에서 진단을 꼭 받아보라고 권했고, 엄마는 반신반의하면서 아빠를 데리고 검진을 받았다. 


  당연히 병원에서는 우울증 판정이 나왔다. 브린텔릭스를 처방받았고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고 했다. 돌이켜 보니 징조는 있었다. 아빠는 내게도 계속 이 집이 너무 좋다고. 자기 인생이 이걸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동물을 유기하는 사람은 큰 죄를 받을거라고 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집이 너무 크고 어수선해서 버겁다고 말하고. 키우는 개들을 남에게 줘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 추석. 아빠를 보러 강원도로 내려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