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12월 10일 토요일
1983년 문을 연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은 올해 12월 31일까지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 몇 년 전부터 겨울이 되면 매년 아이들과 함께 힐튼 자선 기차를 보고 사진을 찍는 게 소소한 연말 가족 이벤트였는데 또 하나 작은 추억이 고여있던 장소가 이렇게 스러져간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아이들과 호텔에 다녀왔다.
차를 운전해 힐튼 호텔로 가는 길에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치며 예전에 8번 출구 방향에 있던 서대문아트홀 극장이 문득 떠올랐다. 손으로 그린 포스터가 걸려있을 때부터 봐왔던 극장이 어느 순간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숙박 시설이 들어섰다. 순간 생각은 한참 떨어진 종로 3가로 날아가 기억 속의 서울극장과 단성사를 불러온다. 추운 겨울 서울극장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영화표를 사던 나는 어느샌가 20년 전 단성사에서 조조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치킨런을 본 경험을 떠올리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고 단성사는 인적 없이 을씨년스러운 보석가게가 되었다. 이 도시는 조금이라도 쇠잔한 것들을 도무지 남겨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언제나 기반 없이 달리고 망각으로부터 쫓기는 이 느낌은 가축을 먹일 풀을 찾아 사위를 살피는 불안한 유목민의 기분을 닮아있지 않나 싶다.
30여 년간 달려온 자선 기차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인지 평소보다 더 큰 규모로 설치되었다. 매년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라진 기차들과 추가된 건물들을 보면서 올 한 해 나도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작년과 비슷하게 무사히 잘 견뎌냈다는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아쉽게도 주변의 식당가나 꽃집은 이미 사업을 정리했는지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코로나 이전, 중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 때문에 외식이 불편한 시기였는데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던 직원분들 덕분에 오랜만에 아이를 옆에 두고 아내와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서먹한 시대에 누군가의 상냥했던 순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뭐라도 먹을까 싶어 로비로 올라갔다. 카페의 생과일주스 한 잔은 19,000원이었다. 이제 호텔도 없어지는 마당에 아이들과 디저트라도 먹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 돈이면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과일과게에서 딸기 두 팩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참았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아이들에게 한 근에 18,000원 주고 산 맛있는 삼겹살을 구워주며 아까 생과일주스를 안 먹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나 스스로가 순간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라 느껴진다. 추억은 현실과 돈 앞에서 이렇게 속절없이 작아지는 걸까. 지난 추억이 절대 돈보다 의미가 없는 건 아닐 텐데. 괜시리 불만섞인 헛기침이 난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오피스, 호텔이 같이 있는 복합공간으로 다시 건설한다고 한다. 마지막 운행중인 자선 기차를 보며 행복해하던 아이들에게 생과일주스를 먹을 돈을 아껴 삼겹살을 구워주는 나의 마음은 2027년에 그 자리에 새로 생길 건물만큼 복합적이다.
'추억을 받기만 해서 미안해. 정말 고마웠어 힐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