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번째 사진집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
언제 시작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어회화 공부.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ESL 팟캐스트를 듣는 장면은 이제 인생의 클리쉐가 되어버렸다. 중간에 한눈을 팔아 기웃거린 중국어와 일본어는 스타트라인에서 몇 발자국을 떼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06년 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동기들 사이에서 회계사 시험공부가 한창 유행이었다. 당시 담당 교수님의 배려로 회계사 준비 학회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제 발로 걸어 나왔다. 2015년 겨울, 신규 오픈 할인을 받고 이미 식스팩을 만든 기분으로 장기 회원권을 끊은 동네 피트니스 클럽. 채 한 달을 나가지 못하고 환불하러 갔다가 트레이너와 언성만 높인 탓에 다시 찾기엔 어색한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달랑 몇 개의 에피소드만 적어놓으니 2006년과 2015년 사이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 사이에도 이런 일들은 아마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까지 포함한다면, 분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을 지배해온 하나의 패턴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이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공들여 작성한 첫 번째 포스팅만 몇 달째 올라가 있는 블로그가 대표적이다. 나는 방금 먹은 점심보다 비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놓고 약간의 자기애와 허세가 느껴지는 짧은 글을 한편 작성함으로써, 왠지 내일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란 착각에 빠졌다. 이글루스, 티스토리, 네이버 블로그, 작년에 론칭한 다음 브런치는 물론, 최근에 거금 10만 원을 지불하고 운영 중인 스퀘어스페이스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지난 35년은 끈기와 열정이 매우 부족한 인생이었다.
‘2015 소니 월드포토그래피 어워드’에서 창덕궁 후원 설경 사진으로 내셔널 어워드 은상을 받으면서 무료한 직장생활로 채워져 있던 나의 인생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단지 어중간한 취미였던 사진이 삶의 활력소로 바뀌면서 점점 사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이었다.
삼청동의 모 카드회사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의 사진집을 펼친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왜 지금까지 이런 세계를 모르고 살았는지 반성하는 한편, 지금이나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매주 창덕궁에 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문화유산, 아름다운 풍경을 평생 사진에 담자고 결심했다.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모든 게 즐거웠다. 물론 지금도 즐겁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약 2년간 다섯 개의 주제 아래 촬영한 180여 장의 사진으로 열 편의 글을 올릴 계획이다.
불과 2년에 못 미치는 기간이지만 연관성이 있는 주제로 사진을 찍다 보니 제법 결과물이 쌓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퇴근길에 문득 촬영한 사진들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사진집을 만들자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맥북에 아이북스 오서라는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노트와 펜을 갖고 다니면서 짬짬이 사진집의 스토리를 짜고 각 챕터마다 들어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블로그 글을 끄적거리던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조금은 철이 들은 걸까. 그리고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관한 광고를 발견했다. ‘혹시 브런치에 사진집을 올리면 운 좋게 종이책으로 출판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나도 모르게 조금은 속물적이고 주제넘은 상상을 했다. 뭐,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내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되리라 생각한다.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진 말자. 나는 꾸준히 하는 데 약하니까. 걸음마도 못하는 주제에 우사인 볼트를 보며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글쓰기의 처음과 끝을 분명히 정하고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글 쓰는 이유와 주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 길에 맞는 약도를 미리 그려놓으면 길을 잃고 헤매다 중도 포기하는 불상사를, 그 지긋지긋한 패턴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린 지도는 이렇다.
1. 창덕궁의 봄 - 1페이지의 글과 22장의 사진
2. 창덕궁의 여름 - 1페이지의 글과 18장의 사진
3. 창덕궁의 가을 - 1페이지의 글과 15장의 사진
4. 창덕궁의 겨울 - 1페이지의 글과 12장의 사진
5. 종묘 - 1페이지의 글과 16장의 사진
6. 서오릉의 봄 - 1페이지의 글과 17장의 사진
7. 서오릉의 안개 낀 아침 - 1페이지의 글과 20장의 사진
8. 선교장의 겨울 - 1페이지의 글과 10장의 사진
9. 명재고택의 겨울 - 1페이지의 글과 27장의 사진
10. 명재고택의 아침 - 1페이지의 글과 27장의 사진
국토의 넓이가 아닌 깊이를 강조한 유홍준 교수의 글귀가 떠오른다. 한국에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 그런 아름다움을 비싼 돈을 들여 특별한 곳에 찾아가지 않더라도 만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번 연재가 내가 운 좋게 마주친 아름다운 풍경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앞으로 계획에 따라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올리려고 한다. 첫 번째 글은 지도에 나온 대로 ‘창덕궁의 봄’이 될 예정이다. 그중 첫 장을 먼저 공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