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잘 울긴 하지만
할머니가 돌쟁이인 내가 보고 싶어서 옷걸이에 걸린 내 옷을 보고 울었다는 일은 우리 집에서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런 할머니가 너무너무 주책이라서 웃기다는 엄마는 그때의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물론 그 딸은 아이는 물론이고 결혼도 안 했지만서도 만약에, 로 시작하는 손주 이야기에 이제야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며 웃었다. 엄마는 있지도 않은 손주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일렁였으니 말이다.
그 유전자가 어디 가랴.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우는 아이였다. 조금만 속상하거나 조금만 뭉클해져도 어찌할 도리 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아이는 더 더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별 것 아닌 일에도 눈물을 참는 어른이 되었다.
교습소에서 6학년 친구에게 추천해 줄 책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의 수업은 '주장하는 글 쓰기'. 여러 논점을 제시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고 독후감으로 주장글을 써 보라고 할 심산이었다. 눈에 띈 [나쁜 어린이표]를 꺼내 들었다. 아주 어릴 때 분명 나도 읽었던 책인데 내용이 흐릿했다. 마침 시간도 아직 여유 있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라서 그냥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이런 내용이었나? 이런 장면이 있었나? 이런 전개였나?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책의 절정, 주인공 건우가 선생님 몰래 나쁜 어린이표 스티커를 모조리 찢어버린 것이 들키는 장면이 나왔다. 건우의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은 씁쓸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사과하고, '나쁜 선생님표'를 적어놓은 공책을 챙겼다. 그 장면을 읽는 순간 주인공인 건우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무거웠던 '나쁜 어린이표'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히 코 끝이 찡 해졌다. 참내 동화책 읽으면서 혼자 울고 있는 선생님이라니. 스스로가 너무 황당하고 웃겼지만 웃으면서도 눈물을 손등으로 몇 차례 훔쳐내야 했다.
게다가 이젠 감정이입하는 인물이 또 생긴 게 웃겼다. 어느새 나는 주인공 건우도 건우지만 선생님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말 안 듣고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 '나쁜 어린이표'라는 제도를 만들어서라도 반을 잘 이끌어가고 싶었던 그 마음과, 동시에 '나쁜 어린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는 부끄러움. 선생님이 '나쁜 선생님표'를 버리지 않고 챙겨가는 모습이 깊이 이해되어 버렸다.
종종 수업이 끝나고 나면 힘들다 푸념하며, 저학년들이 정말 싫다고 해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책상에 앉아 있는 것도 어려운 작은아이들은 자기의 발 보다 훨씬 큰 실내화를 떨어트리며 쉬는 시간은 언제 주는지에만 관심이 많았다. 어르고 달래 수업을 하면서 여기다 또박또박 써 보라는 말에 연필을 부러트리고 괜히 다른 소리만 해 대는 모습이 솔직히 힘들기는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생스럽게 만들다가도 쫑알쫑알 이야기할 때 보면 또 그렇게 예쁘면서 말이다. 예쁜 모습도 알고 있지만 자꾸 미운 모습들만을 지적하던 내 마음이 얼마나 좁았음을. 그러니까 나는 몇 달째 나쁜 어린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이다.
내 마음 안에 있던 '나쁜 어린이표'스티커를 모조리 버렸다. 건우만큼의 불안과 해방감은 없었지만 선생님이 건우의 '나쁜 선생님표'목록을 챙기던 무게감은 느껴졌다. 참으로 어려운 일인 걸 알지만, '좋은 선생님표'를 받으려면 '좋은 어린이표'를 많이 만들어 내야지. 괜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