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담 조셉 Apr 19. 2024

Au revoir, Maman!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기로 했다.


4월 봄방학이라, 둘째는 일주일 사설 학교(centre loisir)에 보내고 축구를 좋아하는 첫째는 축구 교실을 3일 등록했다. 엄마가 사업을 한답시고 일은 주말까지 합쳐서 예전 회사원 때보다 더하긴 하는데 정작 버는 돈은 없으니 엄마 노릇이라도 이 참에 잘하자 싶었다. 그래서 일주일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나머지 한주는 그렇게 다른 곳으로 아이들을 보내기로 했다. 

방학 때는 사설 프로그램이 원래 다니는 학교가 아닌, 보통 다른 학교로 배치가 되는데, 둘째는 친한 친구도 없는 낯선 학교가 싫은지 학교 교문부터 다리 한 짝을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 엄마가 완강하게 맘이 바뀔 생각이 없으니 급기야는 다리를 때리기 시작한다. 얼르고 달래는 것은 아이의 맘을 더 흔들리게 할 뿐이라 냉정하게 "안녕"하고 돌아서는 게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해야 되나. 첫째 때는 발길이 안 떨어져 뒤를 한참을 돌아보고 멀리서 눈물을 훔치고 했는데도 역시 둘째는 그래도 해봤다고 맘이 덜 아픈 것은 적응이 된 거라 봐야겠지. 


첫째는 축구가 좋은지 아침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축구만 주주장창 하고 오는데, 어제는 데리러 갔더니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와서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하다. 몇 시간 동안 얼마나 뛰어 댕겼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콜릿으로 달래 가며 아이의 마음을 살살 물어봤더니, 자기는 큰 형들이랑 놀고 싶은데 애들이 덩치가 작다며 안 끼워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형들이 한번 같이 놀아 줄라치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욕도 종종 듣는 모양이었다. 원래 사내들 세계가 그렇지 뭐. 축구하고 애들이 다치고 열받으면 욕도 하고 하는 게지 - 왜 그게 그렇게 입이 댓발 나올 만큼 기분이 또 나쁜가 또 물었더니. 본인이 코치한테 여러 번 말을 했더니 코치가 별일 없는 듯이 그냥 가서 축구하라며 모른 채 한 게 영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래봐야 아직 7살인데, 세상에 자기 하나 보호해 줄 무언가가 없다는 게 내심 서러웠던 게지. 

괜찮다. 아가.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그게 좀 거칠 뿐인 거다. -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리고는 둘째 날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더니 아침 7시부터 호날두 옷으로 축구복을 갈아입더니 샌드위치 가방 하나 들고 "au revoir, Maman! (안녕 엄마!)" 란다. 7번 마크가 적힌 빨간 호날두 축구 복이 멀어져 간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의 마음이 욕을 들어도, 누가 자기를 보호해주지 않아도 거쳐야 하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인 건지 그냥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특하면서도 짠하다. 저 아이가 10여 년이 지나 자기 인생을 혼자 살아갈 때가 되면 그때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문을 나서면서 Au revoir, Maman!이라고 또 내게 얘기하겠지.

그렇게 갑자기 감정 이입을 하고 나니, 눈물이 왈칵 나올 거 같았다. 

둘째는 다리를 감싸고 매달리는 아이를 매몰차게 떼고 나왔어도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축구복 입고 잘 갔다 오겠다고 하는 첫째 아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눈물 지을께 뭐람. 

그러고 보면 저들 인생 살겠다고 선언할 날도 멀지 않았다. 둥지 안에서 잘 키워두고 나중에 훨훨 날겠다고 하면 후련하게 보내줘야지. 그게 내가 할 일이지 뭐. 


 



최근 나는 엄마 아빠와 더 이상 연락을 안 하기로 했다. 

완전히 연락을 단절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당분간은 내 마음이 추슬러질 정도는 공백기를 두는 게 맞는 거 같다 싶어 연락을 끊었다. 일주일에 이틀 걸러 전화하던 딸이 한 번에 연락이 없고 묻는 말에는 "o.o"만 남기니 두 분이 돌아가며 문자를 남겼다. 

"무슨 일이 있냐" "잘 살고 있냐"...

나의 대답은 o.o 


엄마한테는 내가 한국에서 독일을 나오는 그날부터 틈만 나면 전화를 했다. 단순이 10분 정도 통화하는 사이는 아니고 시시콜콜한 하루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기 때문에 매번 족히 한 시간은 통화를 한다. 멀리 사니까 그렇게라도 시간을 들여서 서로의 일상을 옆에 사는 거처럼 듣는 게 마음이라도 가까워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엄마랑 늘 상의를 했다. 취직, 비자, 남자친구 얘기 등 고민이 되거나 엄마의 의견이 필요한 날이면 그날의 통화는 더 길어졌다. 엄마의 결론은 늘 성당 가서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 엄마가 큰 버팀목이 되어줄 수 없이 훌쩍 커버린 딸의 일을 엄마가 대신할 수도 없을 테고 그저 전지전능하신 신께 기도하면 엄마를 대신해 너의 물음에 답을 줄 거라는 - 멀리 사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을 거다. 


얼마 전 홀로 서기를 시작하고 당장에 번쩍할 거 같던 내 프로젝트는 예상과는 다르게 저조했다. 이제는 우여곡절이 지나고 모든 일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는 걸 알고 난 이 순간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졌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 잡기까지는 나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기간이 지나고, 어느 갑자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대고 계속해서 "내가 여기 있소""나를 한번 봐주시오" 하고 허공에 외치는 일에 내가 제풀에 꺾이고 만 거다. 가방을 만들어 사진도 찍고, 사람들도 만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했다. 

모래 바람뿐인 광활한 사막에 홀로 서있는 느낌이었다. 

혹여나 내가 오늘 하루에서 놓친 것이 없는지 해야 할 것을 다 했는지 생각하느라 밤에는 12시가 지나도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그러다가 불안하면 지하실에 내려가 다시 가방을 만들었다. 시간을 들인다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니요, 이 시간이 언제까지라는 보장도 없었다. 매일 벽을 마주하는 거 같았다. 

나는 그렇게 긴 터널을 혼자 지나고 있었다.


그런 때에도 나는 부모님께 메시지 한 장 보내지 않았다. 

좋은 곳에 어디 그냥 취직하라는 공식화된 답을 그땐 못 들을 거 같았다. 아니 어떤 얘기라도 그땐 내가 가벼이 소화를 못 시킬 거 같았다. 심지어 성당 가서 기도하라는 그 흔한 결론조차도 나는 가만히 들어줄 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보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좀 더 어른다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6여 년의 내 모든 커리어를 접고 내가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두 분의 반응은 그저 뜨뜻미지근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고 곧 돈도 많이 필요할 텐데 이런 사업을 하겠다고 하니 왜 평탄해진 인생에 저 아이는 또 오춘긴지 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제풀에 꺾이지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모에게서 사업은 좀 진전이 있느냐, 사갔던 사람들 반응은 좀 있더냐 이런저런 물음도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식이 가장 매진하고 힘들이고 있는 일에 우리 부모님은 정작 관심이 없었던 거 같다. 


나이가 드시면 원래 그래. 
니가 부모님을 바꾸려고 하는 거보다 니가 그냥 지는 게 나아.
어차피 안 바뀌실 테니. 


주변에 있는 언니들 열에 아홉은 다 그렇게 얘기를 했다. 

난 바꾸려고 한 적 없다. 

내가 원했던 건 인정이었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 하지만 너의 생각이 그렇다면 너의 인생을 개척해 봐라. 나는 뒤에서 열심히 지지해 주겠다'라는 든든하고 가슴 따스운 인정이었다. 

인정이 곧 사랑일 테니까. 


내가 엄마에게 사흘 넘어 전화를 했던 것은 끊임없는 나의 생각의 전달 방식이었고 소통이었고 그게 교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마흔이 다 돼서야 깨달았다. 자식이 나이가 들면 탯줄은 태어날 때 끊지만 정신적인 탯줄은 성인이 되면 언젠간 자연스레 끊기는데 나는 그것이 엄청난 것인 거 마냥 아직까지 내가 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지금 Au revoir, Maman 이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 아들이 커서 독립을 하는 날 내게 Au revoir (잘 있어)라는 말을 할 때가 되면 내가 인생을 그렇게 헤맸던 거처럼 현실이, 인생이 원래 순탄치 않다 말해주고 싶다. 마흔이면 나도 인생이 평탄해질 같았지만 지금 이런 터널을 지나고 있는 거처럼 인생이 원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 

어떻게 인생이 늘 장밋빛만 있을 수 있더냐.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장밋빛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지만 인생이 원래 그렇지가 않은 것을. 나는 어둠도 있고, 터널도 있고, 천둥도 번개도 있다고 말해줄 거다. 그게 밑거름이 되어 너의 인생에 굳은살이 되어줄 거라고 - 이겨내라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작가소개] 여러분 반갑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