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밀 Jul 24. 2023

왜 검은 옷만 입냐고요?

나다운 모습으로 산다는 것


"왜 검은 옷만 입어요?"


검은 상의에 검은 바지를 입고 출근한 내게 팀장님이 넌지시 물으셨다. 항상 검은색 옷만 입는 것 같다고. 본인이야 나이가 있어서 어두운 옷을 주로 입는다지만 그쪽은 젊지 않냐고 했다. 팀장님이 하시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실 스스로에게 여러 번 질문한 적이 있다. 출근복의 대부분이 검은색 일색인 이유에 대해서.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간단했다.


"일복입니다."


한마디로 일을 할 때 입는 옷이라는 뜻이다. 팀장님이 궁금해하신 나의 출근 복장을 잠시 설명하자면, 검은색 하의는 기본값이고, 외투는 검은색 패딩 혹은 검회색 울재킷 두 가지를 돌려 입는다. 가방은 검은색 나일론 크로스백 하나. 사시사철 검은색 양말과 검은색 운동화를 신는다. 검은색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외투와 가방을 정해둔 것은 출근 준비가 한결 편해지기 때문이고, 검은색이 지배적인 이유는 오염되더라도 표가 나지 않아 신경 쓸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스티브 잡스 같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양말 하나도 골라 신어야 하는 세상을 살면서, 서랍을 열자마자 가장 위에 놓인 것을 고민 없이 집어들 수 있는 시스템은 말 그대로 혁신이 될 수밖에. 스티브 잡스처럼 매일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지는 않지만, 출근 복장을 단순하게 정비하면서 실제로 스스로를 단장하는 데 들였던 많은 시간을 줄였다. 처음에는 그저 몸이 편하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세운 점이 나를 가장 뿌듯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스몰토크에 강한 사람이 못 되어 "일복입니다."라는 대답 뒤로 더 얘기하지 않았고, 그대로 대화는 종결됐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에 갔다가, 수저통에 한가득 꽂혀 있는 숟가락을 보고는 나 홀로 명쾌한 자문자답을 하기에 이른다.


'숟가락이 꼭 알록달록해야 하나?'



숟가락 본래의 기능에 충실해야 밥도 국도 잘 먹을 수 있다. 심미적인 기준보다 기능적인 면이 더 중요한 때와 장소가 있는 법. 하루에 수천 명이 사용하는 수저에 예쁜 장식이나 따듯한 느낌을 주는 나무 손잡이가 없는 이유다. 그런 것들은 수만 번의 부딪침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


마찬가지로, 하루에 8시간 이상 앉아서 보내게 되는 직장에서 젊은이들이 꼭 화사한 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싱그럽고 산뜻한 느낌은 사무실과 복도에 놓여 있는 화초만으로 충분하다. 검은 옷 입기는, 일터에서 나를 거치적거리게 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할 것 같아 본능적으로 선택한 길이다. 얼룩이 생길까 봐, 주름이 질까 봐 옷매무새를 정돈하느라 바빴던 시간들. 그런 과거에 비해 지금의 나는 모든 움직임에서 훨씬 더 편안하고 자유롭다.


평범한 일터에서는 옷차림보다 업무 성과가 더 중요하다. 능력 좋은 팀장님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아실 테지만, 지난 2년간 같은 옷만 입는 것처럼 보이는 직원에 대한 호기심을 애써 감출 생각도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11년 차 직장인이 된 나는, 남이 보는 내가 무채색의 재미없는 사람이더라도 상관없다. 소중한 이들과 다채롭게 채워 가는 일상이 더욱 또렷하고 강렬하게 삶을 덧칠해 주니까. 인생은 완전한 자연 그대로의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무슨 색의 옷을 입는지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원하는 색깔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조금 별나 보이면 어때, 하는 생각으로 나다움을 위한 삶의 방정식을 만들어 가는 것. 알록달록한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 냉장고를 비우는 기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