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밀 Nov 28. 2023

따끈따끈한 것들이 주는 평화

김치찌개


고등학생이 된 무렵에, 엄마에게 하루 중 언제가 제일 좋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자려고 누웠을 때."


그때는 엄마의 경제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였다. 딸들이 등교하고 나면 바쁘게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는 게 일상이던 시절. 휴일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지만 우리 앞에서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의 입에서 나온 '자려고 누웠을 때'라는 말이 당시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겨울이 오면 그때의 기억이 더 자주 떠오른다. 누군가 하루 중 가장 좋은 순간을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자려고 누웠을 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 퇴근 후 이루어지는 일상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게 되었다. 집에서 소박하게 먹는 저녁 식사, 푹신한 소파 위에서의 인터넷 서핑, 선호하는 제품들로 채워진 욕실에서의 샤워. 이 모든 루틴을 마무리한 뒤 침대에 몸을 뉘일 때면 하루의 노고를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행위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따끈한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 신김치와 참치를 넣고 푹푹 끓여 먹는 김치찌개도 그중 하나다.




1. 신김치, 대파, 양파를 먹기 좋게 썰어 냄비에 담고 재료가 살짝 잠길 정도로 물을 넣는다.

2. 설탕 1숟갈, 참치액 1숟갈, 국간장 1숟갈, 고춧가루 1숟갈을 넣는다.

3. 중강불로 올려서 찌개가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내리고 김치가 푹 익을 때까지 충분히 졸인다.



최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더 많이 생각나는 반찬이다. 24cm 양수냄비에 끓여 두면 혼자서 3~4일 정도는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는 끓이면 끓일수록 재료 본연의 맛이 우러나면서 감칠맛이 생겨 더욱 맛있다. 따끈따끈한 김치찌개에 햇반만 있으면 제아무리 추운 겨울이 와도 퇴근길이 든든하다. 윤기 나는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두부를 으깨어 한 입. 푹 익은 김치를 올려서 한 입. 뜨거운 찌개 국물을 후후 불어 또 한 입 하다 보면 그동안 바깥 음식으로 물려 있던 입맛이 살아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설거지를 끝낸 뒤에는 샤워 가운을 들고 욕실로 향한다. 온기를 품은 물줄기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면 냉기만 돌던 화장실이 어느덧 따뜻하게 덥혀진다. 조금 더 따끈따끈한 온도는 명상을 가능하게 한다. 회사에서부터 가져온 고민거리 때문에 찝찝했을 때도,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한 뒤 노여움에 어찌할 줄 몰랐을 때도 샤워를 하다 보면 마음이 서서히 달래지는 경험을 수없이 했다. 긴장이 풀리고 전신이 이완되면 내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긴다. 걱정과 예민함은 결국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간다.



저녁 루틴의 마무리는 잠들기 전 이불속에 손을 넣어 적절한 수면 온도가 되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겨울이 되고 생긴 습관이다. 전기요는 1단으로 켜 두고, 체온으로 좀 더 따뜻해질 때까지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인터넷 서핑도 하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눈다. 조금 뒤 따끈따끈한 기운에 취해 눈에 졸음이 가득해지면 남편이 이야기를 멈추고 베개를 바로 해 준다. 까무룩 잠이 들려다가, 이런 게 엄마가 말한 하루의 행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시린 겨울이더라도 따끈따끈한 것들은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그 속에서 오래도록 평화롭기를 바라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