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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Dec 27. 2016

사표, 그 이후

'전업맘'이 된 후 달라진 나의 세계에 대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인생의 문턱에서 저울질을 한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거의 모든 것을 바쳐온 자신의 일, 그리고 비록 인생에는 가장 최근에 등장했지만 그 중요도가 이전 무엇보다 역대급으로 높은 자신의 아이, 그 둘을 놓고 말이다. 그 저울질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무한 반복되곤 한다.


2016년 10월 출간한 책 <요즘 엄마들> 마지막 챕터의 일부다. 그리고 그 챕터의 제목은 "사표를 쓰다"다. 나는 같은 해 6월, 육아를 이유로 10년간 재직하던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도무지 두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 생활까지 잘 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먼 지역에 계신 양가 부모님은 육아를 도와줄 상황이 못 고, 육아에 적극 참여하지만 해외출장이 잦은 남편 일의 성격상 두 아이를 온전히 혼자 돌봐야 할 일이 잦을 예정이었다. 독박 육아하는 엄마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아이들을 하루 종일 남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뜻인데, 나는 그것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여러 가지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는 의미다. 우선 내 소중한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 대체로 한 가정의 가장인 남성들을 조직 구성원의 표준으로 상정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한국 조직의 문화는 육아나 살림 따위는 관심 영역 밖의 일일 뿐, 그저 '엉덩이를 박고 앉아' 조직에 충성하는 직원을 요구한다.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엄마는 하루 종일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엄마라는 이름은 마이너스 옵션이다. 아이를 돌보면 일에만 전력 질주할 수 없는 경우가 잦아지고,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워킹맘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열등 사원'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이러한 현실 판단과 고민 끝에 내 저울의 추는 결국 아이 쪽으로 기울었고 나는 사표를 냈다.


의외의 복병, 전업맘의 자아 상실감


퇴사 후 대체로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평일에 아이들과 붐비지 않는 동물원과 박물관에 갈 수 있었고 그렇게 아이들의 일상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몇 달간 속으로는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퇴사 전부터 예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직업이 사라짐으로써 사회적으로 나를 설명할 길이 없어지고 일로 실현해온 자아를 상실해간다는 불안감이 갈수록 커졌다. 사표를 고민할 때부터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했건만, 막상 겪어보니 세상에 나를 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영역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란 예상보다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무게가 더 크기에 쓴 사표였지만, 애당초 일의 무게 역시 만만치 않았던 저울질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테다.


때문에 나는 당장 재취업할 의사도 없으면서 퇴사한 지 3달 만에 취업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돌아보면 나의 사회적 가치를 가늠해보며 바닥난 인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보장하는 질 좋은 일자리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시간선택제나 프리랜서 일은 내가 가진 숙련기술(?)인 취재 및 글쓰기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이따금 헤드헌터라는 사람에게서 취업을 제안하는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모두 풀타임에 강한 업무 강도가 예상되는 자리여서 욕심이 나더라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런 현실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전업맘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엄마들의 세계에 뛰어들기로 마음도 먹었다. 또래 아이를 둔 엄마들과 만남을 가지거나 그들과 육아 및 교육 정보를 교류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활동'들이 전업맘으로서 성취감을 높여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엄마들은 영어, 미술, 체육 등 아이들을 각종 사교육에 일찌감치 노출시키는 데 익숙했고,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나는 다른 엄마들과의 만남으로 위축되곤 했다. 일생동안 공부나 일만 해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이들을 강도 높게 매니징하는 '헬리콥터 맘' 같은 역할이 몸에 맞지 않은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Nha Trang Beach, Vietnam

우울감이 극에 달할 때쯤엔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남편과도 가고, 친정 엄마와도 가고, 시어머님과도 갔다. 모두가 편안해 보이는 휴양지에서조차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에서 갖는 시간들은 내 불안한 감정을 조금은 다스려주었다. 매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아이들에게 만화 영화를 보여주면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 좋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자극과 환경 속에서 주어지는 크고 작은 새 과제, 예컨대 맛집을 찾거나 스케줄을 정하는 일 등이 나의 잠자던 뇌를 자극시켜줘서 좋았다. 아무래도 내가 육아에 전념하며 가장 크게 느껴온 갈증은 말하자면 '성취감의 부재'였던 듯 싶다.


스트레스는 책이 출간되면서 다소 잦아들었다. 책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나 블로거들의 리뷰를 모니터링하고 인터넷 서점의 판매지수를 살펴보며 내가 사회와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존재임을 확인했다. 주변의 격려와 축하 인사는 물론,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도 책을 통해 인사를 주고받으니 바닥난 인정 욕구가 채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출간 후 두어 달이 지나고 책에 대한 관심이 차차 사그라질 때쯤, 나의 마음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을 통한 공식적인 일상이 사라진 이상, 이 공허함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과 아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사회


아이 키우는 데 전념하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쏟아붓던 일을 포기했건만, 막상 그만두고 나니 아쉬움과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언젠가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어떤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도 틈만 나면 연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자라야 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 손이 더 많이 가고 입시생이 되면 엄마도 똑같이 입시생이 되어야 한다는데, 과연 풀타임 직장에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때가 오기는 할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워킹맘으로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장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다. 일하느라 하루 종일 회사에 있으니 아이들과 마주하고 살을 부대끼며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하긴 대한민국 취업자들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 다음으로 가장 길다. 하루 법정 노동시간 8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평균 OECD 국가보다 43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OECD, 2016년 고용동향) 이렇게 노동집약적인 하루를 보내다 보면 아이들에게 쏟을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일하는 여성의 육아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주로 공공보육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육아휴직을 확대하고 질 좋은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리는 대신, 보육시설의 운영 시간을 늘리고 돌봄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는 방법이 우선시 된다. 이 두 가지 방향의 정책들은 완전히 다른 철학에 근거한다. 공공보육 확장에 집중하는 정책의 근간에는 "아이는 국가가 키울테니 엄마 아빠는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라"는 철학이 있다. 철저히 기업 중심적이며 자본가의 이익과 필요에 따른 것이다. 노동자들이 제 아이를 직접 키우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평범한 일상을 누릴 시간을 보장하는 '행복권'은 배제한다. 그렇다고 공공보육의 질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준도 아니다 보니, 한국 사회의 육아는 결국 조부모가 담당하는 노동으로 전이되고 있다.


'헬조선'을 자조하는 한국인들은 북유럽 국가들을 이상적인 곳으로 꼽는다. 북유럽의 엄마들은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렇지 못한 여성들을 오히려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 한국처럼 노동자를 해고하기 위한 수사로 전락한 노동 유연성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의 질과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북유럽처럼 바뀌기를 기다리다간 내 아이들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될지도 모르니, 아예 한국을 떠나는 게 답이라는 정서가 점점 더 팽배해지고 있다. 나 역시 일과 아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삶이 너무 징그러워 언젠가는 한국을 떠나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표를 내기 전과 후, 내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내 삶을 결정하는 근본 원인인 우리 사회의 구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부패한 정치와 탐욕스러운 기업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본 2016년을 보내는 지금, 더욱 우울한 생각에 휩싸일 뿐이다. 이 정도로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북유럽 같은 사회를 바라던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이곳에서 일과 육아 모두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그 언젠가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바람이었을까.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아이들은 매일매일 자란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한국 엄마인 나는 오늘도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고 살아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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