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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Jan 04. 2017

어린이집 안 다니는 어린이

'엄마도 아이도 행복한 육아' 가로막는 사회

나는 하루 24시간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한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안 다니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는 내가 육아휴직 후 복직을 하던 18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회사를 관두고 몇 달 뒤에는 아예 그만두었다. 엄마는 퇴사를 하고 아이는 퇴소를 한 셈이다. 아직 두 돌이 안 된 둘째 아이 역시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다.


첫째 아이를 통해 2년간 경험했던 어린이집을 떠올리면 그리 유쾌하지 않다. 말 못 하던 아기 때부터 어린이집에 맡겨져 온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아이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미안한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다. 잊을 만하면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이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우리 사회의 현실도 늘 내 마음 한 구석을 불편케 했었다.


어린이집을 불신하게 된 구체적 사건들도 있다. 처음에 다녔던 가정 어린이집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했는데도 부모들에게 제때 알리지 않아 분노했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로 다녔던 구립 어린이집은 우리 아이의 입소 순위를 누락해 1년을 더 기다리게 만들어서 이에 분개하며 구청에 민원 전화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운이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어린이집의 수준이 대부분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린이집에 보내는 엄마들의 사정


2015년 인천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당의 중진 의원이라는 자가 "어차피 공짜인데 안 맡기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너도나도 보육시설로 아이를 내보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이 발언은 무상 보육 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었는데, 보육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내뱉은 소리여서 공분을 샀었다. 세상에 어느 정신 나간 부모가 보육시설이 공짜라는 이유로 돌도 안 된 자녀를 보육 기관에 보내느냔 말이다.


처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복직을 해야 했지만 아이를 대신 돌봐줄 가족이 가까이 없었고, 아이를 낯선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것보다 그래도 나름 시스템이 갖춰진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안전 문제는 '확률'의 문제였을 뿐, 어린이집에 보내는 내내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못했다. 친정이나 시댁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다른 엄마들이 부러웠고, 일분일초라도 빨리 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매번 눈 질끈 감고 '칼퇴'해서 아이에게 달려가곤 했다.


어린이집은 내가 퇴사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6월에 복직을 해야 했던 나는 둘째 아이가 입소 가능하다고 연락이 온 어린이집에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아이를 보내야 했다. 복직까지 3개월이 남았지만 복직 즈음에 아이를 보내려면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4월생인 둘째 아이는 3월이면 만 10개월밖에 되지 않아 겨우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어렸는데, 돌도 안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는 게 영 께름칙했다. 엄마 혼자서 두 아이를 돌봐도 한 아이에겐 공백이 생기는데 한 명의 교사가 의사표현도 불가능한 아이를, 그것도 여러 명이나 돌봐야 하는 조건을 현실이라며 마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첫째 아이 때 경험하면서 많은 속앓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복직을 고민하던 차였기에, 나는 예정보다 빨리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돌도 안 된 영아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사정은 대개 나와 비슷할 것이다. 복직을 앞두고 어린이집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혹은 당장 일하러 나가야 하는데 봐줄 사람이 없어서인 경우들이다. 언제든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질 좋은 보육 시스템이 충분하다면, 아이를 낳고 당장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면 갓난쟁이들이 낯선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엄마들이 커피 마시며 수다나 떨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해대곤 한다. 어린 영아를 키우는 전업맘들은 입소 순위가 안 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 경우도 별로 없다.


2015년 1월, 19개월이던 첫째 아이가 어둑어둑한 밤길을 걸어 하원하는 뒷 모습이다. 지금 다시 보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짠해서 마음이 휑해진다.

어린이집, 안 보내면 안 되나요?


개인적이든 사회적으로든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어린이집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나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 육아휴직을 하면서부터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계속 보낼지 말지 고민했다. '내가 회사를 가지 않는데 굳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까?' 물론 답이 쉽사리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독박 육아'하는 엄마 혼자 젖먹이 둘째 아이와 만 3살짜리 큰 아이를 24시간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 날과 없는 날에 따라 내 삶의 질은 극과 극을 달렸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한 돌 한 덩이가 자리한 듯 심란함은 계속되었고, 대안으로 오전 중 3시간만 어린이집에 보내보거나 등하원 자체가 어려운 겨울엔 아예 안 보내기도 했다.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신청해 돌보미 선생님의 도움을 얻거나 이따금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여동생의 조력을 받아가며 두 아이를 근근이 키워나갔다.


그러다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 생활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소를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다. 아이는 동생이 태어난 후 자기만 어린이집에 가고 엄마는 동생과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고 있었다. 또한 만 3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에게 어린이집의 규칙적인 생활은 꽤나 스트레스를 준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어린이집에서 또래 아이들과 지내면서 질서를 지키고 양보하거나 기다리는 경험을 통해 '사회성'을 키워나간다고도 하지만, 과연 그 사회성을 굳이 두세 살 짜리 아기에게 길러주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나이는 엄마와 충분히 살을 맞대고 비비며 사랑을 느끼고 애착을 다져야 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결국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을 퇴소했고 그곳에서 보내던 하루 3시간을 엄마가 회사 다니느라 부족했던 애착을 더 깊게 다지는 데 쓰게 됐다.


퇴소를 결심한 후 나를 당황케 했던 건 주변의 반응이었다. "대단하다", "존경한다"는 면구스러운 반응도 있었고, "엄마가 너무 힘들지 않겠느냐", "베이비시터를 고용해보라"며 엄마를 걱정하는 반응도 많았다. 왜 엄마가 제 아이를 다른 도움 없이 키우는 일이 그리 특별한 일이 되었을까.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그 어린이집을 싫어하면 다른 곳에 보내보지 그러냐", "어느 기관이든 다니긴 해야 할 텐데"라는 반응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린 영유아기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이 당연한 성장 과정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걸까.


엄마의 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유아들을 어린이집으로 보내는 일에 무감해진 우리 사회는 어찌 보면 참 서글프다. 엄마에게 주어진 짧은 육아휴직 기간, 반대로 너무 긴 노동 시간, 육아의 짐을 나눠질 공동체가 무너진 현실 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거나 대책을 촉구할 당사자인 엄마들은 당장 생업과 육아라는 현실의 짐에 짓눌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바쁘다. 아이 키우는 여성의 삶에 관심이 없는 이 사회는 그저 엄마들에게 "버티면 지나갈 것"이라는 무책임한 위로만 건넬 뿐이다. 그저 버티는 방법밖에 없는 엄마들을 착취하는 데 익숙한 이 사회는 결국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부모의 품과 사랑에 갈증을 느끼며 자라는 불행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 집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아이가 너무 좋아한다. 아이는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아침부터 더 자고 싶은 아이를 깨워 서둘러 어린이집에 보내는 '스케줄'이 사라지니 아침이 여유 있고 평화롭다. 바쁠 것 없는 아이에게 "빨리빨리"라고 재촉하는 일도 없어지고,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공원이든 수족관이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어 좋다. 때로 게으름을 피우고 싶으면 하루 종일 늘어진 채 집안을 뒹굴거리며 마음껏 심심해하는 무위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24시간 함께 하는 아이들의 생활 리듬을 고스란히 알기에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라 손이 덜 가게 되어 그런 것이기도 할 테지만,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지금은 단언컨대 내 육아 경력 가운데 가장 수월하고 즐거운 시간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복이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맘으로 아이 키우기를 선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참담하다. 일을 계속했다면 아직도 아이나 나 모두 울며 겨자먹기로 어린이집에 의지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현재의 나와 같은 행복을 꿈꾸며 사표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을까. 아이를 위해 엄마의 인생을 저당 잡혀야만 겨우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이 사회는 엄마들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굴고 있는가.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향해 싸워야 엄마도 아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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