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시간은 길지 않다
볕이 잘 드는 어느 겨울날의 오후. 거실에 찾아든 볕 사이 무지개를 살펴보며 내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떠든다. 정신없는 아침 시간에 미처 감지 못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나는, 그 깔깔대는 소리가 듣기 좋아 녀석들의 볼을 비비다 이내 간지럼을 태우면서 바닥에서 함께 뒹군다. 나른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이 공간, 이 순간. 분명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들은 눈물바다에 잠긴다. 한 녀석은 책을 읽어달라 떼쓰고, 한 녀석은 블록을 같이 쌓자고 칭얼댄다. 평소에는 만지지도 않는 장난감인데 한 녀석이 만지기 시작하면 어쩐지 쟁탈전이 벌어진다. 몸이 하나인 엄마는 이쪽저쪽 우왕좌왕하다 진이 빠진다. 결국 설움이 북받친 두 녀석은 울음을 터뜨리고, 나중에는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엄마 품을 파고든다. 이때에도 엄마에게 자기가 우선이 못 되면 눈물은 배가 된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일이다. 그것도 하루에 십 수 번을 말이다. 엄마의 얼굴은 아이의 감정 변화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와 악마로 탈바꿈한다. 엄마의 독립된 자아 따위는 일찌감치 장롱 속에 처박에 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아 보일 정도다. 분명 육아는 기존에 경험해보지 못한 정말 새롭고 기이한 경험임이 틀림없다.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한다는 것은 노동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돌보려면 많은 종류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노동이란 게 지난 10년 동안 내가 해오던 일과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엄마가 된 초창기의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육아는 종일 별다른 지향점 없이 느슨하고 산만한 노동들로 채워진다. 아침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밥 먹이고, 응가를 치우고, 양치를 시키고, 책을 읽어주고, 놀아 주고, 씻기고, 잠을 재우는 일들로 이어지는 하루 일과는 매우 부산하기 짝이 없는 반면 큰 성과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큰 틀에서야 아이가 온전히 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돕는다는 점에선 목적지향적이지만, 일상 중에 그 목적을 되뇌며 육아에 임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반면 내가 해온 기자 일은 매우 목적지향적이고 집약적인 노동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 쓸 기사를 정하고, 종일토록 그 기사를 쓰기 위한 취재에 매달리고, 정해진 시간 안에 기사를 마감하면 되었다. 목적도 뚜렷하고 성과도 명확하니 짧은 시간 안에 성취감을 맛보기 쉬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알게 모르게 매일같이 느껴온 성취감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나 업무 외의 다른 일을 대할 때마저 취재하고 기사 쓰듯 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 그게 내가 고수해온 생활 습관이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되어서도 이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굳이 그 시간의 의미나 목적을 찾으려는 습관을 유지했고,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집에서 머물기보다 어디든 나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다. 혼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 열렬히 쏘다니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대단한 체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보아도 그런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이건 둘째 아이가 좀 자라서 밖에서도 잘 걷고 외식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된 후의 이야기이긴 하다.
아이들과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아이들에게 새롭고 즐거운 경험을 선사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한편 '엄마'가 직업이 된 전업맘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를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나름의 목적의식에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느슨하고 산만한 육아 생활 가운데 내 노동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어쩌면 나는 사회적으로 주목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내 돌봄 노동에 대한 인정 욕구를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집중하는 방식으로 충족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막상 찾아보면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은 정말 많았다. 모를 땐 키즈카페나 놀이공원 등 비싸고 소비지향적인 놀이 공간을 찾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린이 전용 공공 박물관이나 공공 놀이터, 저렴한 사설 체험 시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잘 찾아보면 월령이 다른 두 아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도 있었고, 시설과 짜임새 모두 높은 수준이면서 무료이기까지 한 놀이터들도 많았다. 대한민국이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이렇게나 많은 복지 국가인 줄은, 워킹맘이던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많은 곳을 다니는 게 나와 아이들 모두에게 좋기만 한 일인지 의문이 생겼다. 의외로 나 자신은 물론 아이들도 소진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보고 느끼는 아이들이 즐거워 보여 뿌듯하고 기뻤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담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갈수록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을 원하는 것 같았고, 나는 마치 기자 시절 취재 스트레스를 느낄 때처럼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체력적으로도 무리 없이 다니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차에서 낮잠을 잘 수 있었지만 운전을 하는 나는 일과 중에 늘 피로를 쌓아갔다.
어느 날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들과 쉬면서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만화영화도 보고 간식도 먹었지만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갔다. 그간 쌓인 피로도 몰려왔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를 어찌 보낼지 막막하던 나는, 이내 '태업'을 선언했다. "얘들아, 엄마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우리 같이 누워서 쉬자!"
아이들은 처음엔 침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였지만, 엄마가 가만히 누워 있자 차츰 조용해지더니 이내 내 곁으로 다가와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낮잠을 안 자기에 그저 '체력 좋은 녀석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이 녀석들은 충분히 낮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순간 예전에 들었던 독일 발도르프식 교육 전문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엄마가 아이들을 빨리 재우고 TV도 보고 싶고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이들도 다 느껴요. '엄마가 우리를 재우고 뭔가 다른 걸 하려고 한다'라고 말이죠. 낮잠이든 밤잠이든 엄마도 편안하게 누워서 함께 쉰다는 마음으로 임해 보세요. 아이들은 금세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 겁니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꿀 같은 낮잠을 잔 나는 그 후론 예전처럼 빡센 '외부 활동(?)'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행복감을 만끽했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향후 지속 가능한 육아를 위한, 불가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방향으로의 선회다. 무언가 재미나고 신나는 곳을 발견하면 바지런히 외출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아이들에게 낯선 일상 속 물건들을 만지작거리거나, 몸을 활용해 뛰면서 땀을 흘리거나, 장난감 없이도 상상력을 동원하는 놀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졌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엄마가 애써 특별한 놀 거리를 쥐어주지 않아도, 심심한 가운데 즐거움을 찾는 법을 터득하는 놀라운 존재들이었다. 그 와중에 엉뚱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튀어나온다는 것도 느꼈다.
사실 엄마인 나를 압박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늘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 성공과 성취를 위해서라면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적당히 덮어두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사회 속에서 자라온 나. 그동안 내가 삶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느슨함'을 허락하고 나니, 육아를 노동으로 규정함으로써 느끼는 피폐함이 다소 사라졌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내 개인적 생활의 질도 한결 나아졌다. 아이들과 나누는 감정적 상호작용의 질도 높아졌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마 또한 인생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일인 것 같다.
가끔씩 내 아이들과 이렇게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본다. 있는 그대로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벌거벗은 맨살의 시간. 따져 보면 그리 길지는 않다. 요즘은 이 순간들이 애타게 아깝기만 하다. 그래서 무엇을 특별히 하려고도, 특별히 하지 않으려고도 않는다.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이 평범한 날들은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시간임을 느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