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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Jan 19. 2017

평일을 누릴 권리를 허하라

덜 일하고 더 놀아도 되는 삶을 꿈꾸며

요즘 우리 가족은 주말엔 주로 방콕이다. 웬만해선 외출을 하지 않는다. 주말에 외출을 하면 고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단 나가면 어디든 붐빈다. 즐기러 나온 건지, 사람 구경을 하러 나온 건지 헷갈리게 된다. 뭘 하나 먹으려 해도, 뭘 하나 보려고 해도, 수십 분 줄 서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은 보채기 시작하며 남편과 나는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늘 녹초가 되어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 돌아오기 일쑤다. 외출 자체가 스트레스인 것이다.


주말 아니면 시간이 없던 때엔 기를 쓰고 주말 외출을 감행했다. 엄마 아빠는 일터에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평일 내내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데 주말에라도 삶의 여유를 공유하면서 공동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으로 태어나 무언가를 즐기며 사는 인간다운 일상을 단 한 톨도 누릴 수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으로 꾸역꾸역 밖으로 나온 수많은 이들로 인해, 주말엔 어디를 가든 항상 사람이 넘쳐나는 포화 상태였다. 사람에 치이다 보면 인파만 봐도 진이 쏙 빠지곤 했다. "와 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자기도 그 끔찍한 인파 중의 한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과 분노를 토해내는 아이러니를 경험하다 보면, 주말에 하는 외출이란 삶의 여유라기보다 차라리 삶이 지옥임을 확신하는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젠 내가 퇴사를 했고 남편은 평일에 쉬는 스케줄이 있기에, 우리 가족은 굳이 주말에 바득바득 지옥 같은 외출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평일에 외출을 하고 나들이를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러자 우리 가족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기가 헬조선 대한민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편안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의 평일들은 대체 왜 아예 없는 날처럼 사라졌던 것일까?


평일엔 왜 그렇게 일만 해야 해?


정초부터 세 아이를 둔 보건복지부의 공무원 워킹맘이 과로사했다는 뉴스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분노케도 한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그가 세 아이를 낳고 살아온 최근 몇 년간의 삶은 어땠을까? 주당 70시간. 그는 육아휴직 후 복직한 첫 주에 그만큼 일했다고 한다. 그 끔찍한 근무시간도 모자라 세 아이의 엄마는 아이들과 주말 나들이는커녕 일요일 새벽에도 직장에 나와 일을 해야 했고, 집에서는 육아와 가사 등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으로 내내 풀가동되며 점차 탈진되어 갔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들의 눈치를 보기 싫어 아등바등하며 1인분을 해내려 노력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고 뒤처지는 듯한 스스로를 위해서도 더없이 열정적으로 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안정적이고 노동 환경이 괜찮다는 공무원 신분도 결코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공직 사회에서부터 확대한다던 시간선택제 근무 제도는 어떻게 굴러가기에 세 아이들의 엄마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아니 설사 기회가 있었다 해도 조직에 도움 안 되는 반쪽짜리 민폐 인력이라는 인식 때문에 아예 엄두조차 못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겨진 어린 세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가족에게 던져진 현재의 비극과 남겨진 아픈 삶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헬조선으로 향하는 길은 2017년에도 확장되고 있다.


주말에 일해야 하는 사람 투성인 우리 사회에서 '평일을 즐긴다'는 개념은 사치를 넘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평일에 6시 '칼퇴'조차 꿈꾸기 힘든 상황, '저녁이 있는 삶'은 허무한 정치 구호에 그친 현실 속에서 평일이란 그저 코피 터지게 일하고 부랴부랴 집에 돌아와 또 내일의 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일 뿐이다. 엄마 아빠는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보육 시설에서 지내거나 학원 뺑뺑이로 시간을 때워야 하는 날. 주말 잠깐의 휴식을 위해 근근이 버텨내야만 하는 하루하루가 우리의 평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 평일의 일과 중 직장인들이 집중해 업무를 보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모범 직장인들도 있겠지만, 내가 알기로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게 업무 시간 중 태반은 일하고는 관련 없이 눈치만 보는 대기 시간이나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무관한 소모적인 보고서를 쓰고 고치는 시간, 루틴 하고 무의미하며 효율성 낮은 회의 시간, 사내 정치 참여 시간, 회식 시간 등으로 채워지곤 한다. 순수하게 업무에만 집중하는 방식의 조직 문화만 정착되어도 노동 시간은 줄고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은 높아질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활용해 지금보다 훨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지금 과한 꿈을 말하는 것인가? 그 꿈이 당장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사표를 던졌기에 더욱 분노가 커진다.


평일에 누리는 외롭고 씁쓸한 쾌적함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평일의 삶을 얻은 나는 요즘 외출이 두렵지 않다. 주말에는 사람 많을까봐 엄두도 못 냈던 동물원, 공원, 수족관 등 놀이 공간에 마음 편히 드나든다. 뭐 하나라도 하려면 긴 줄을 서야 했던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등 문화 시설에도 걱정 없이 방문한다.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서는 쫓기지 않으면서 책을 고를 수 있고, 쇼핑몰이나 마트에서도 여유롭게 장을 볼 수 있다. 어디든 언제든 외출에 전혀 부담이 없다. 그것도 그 모든 공간을 무척 넓게 사용하면서 말이다. 평일에 외출할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없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인구 밀집도가 낮고 그토록 쾌적할 수가 없다. 평일에 일찍 가면 줄은커녕 사람 구경조차 못할 때도 있다.


평일 중 가장 당혹스러울 때는 월요일이다.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날이자 가장 일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날이며 고로 놀러 나오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날이기에, 대부분의 공공 문화 시설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차피 월요일에 외출하게 된다면 큰 마음 먹고 연간회원권을 끊어두었거나 그동안 가고 싶었지만 비싼 입장료 때문에 아껴뒀던 사설 공간에 가곤 한다. 질 좋고 저렴한 공공시설은 다른 평일에 언제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우리 사회가 이토록 많은 문화 휴식 공간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어린이' 이름이 붙은 유아동 전용 시설이 생각보다 많다. 찾아보면 지역마다 웬만한 어린이 박물관 하나쯤은 갖추고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아이들이 즐기기 좋은 공원과 놀이 시설이 즐비하다. 우리가 북유럽이나 서구 선진국을 부러워하는 이유도 어린이나 가족을 위한 복지 제도와 공간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막상 지내보면 우리나라도 질 좋고 저렴한 공공복지 문화 공간이 참 많다는 걸 느낀다.


문제는 이런 좋은 인프라를 즐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평일엔 어둑어둑한 저녁에야 모든 가족이 집에 모이니 그런 공간에 갈 시간은 주말밖에 없고, 늘 바글바글한 인파에 시달리느라 그 좋은 공간을 즐길 여유가 없다. 그렇게 빽빽하게 모이는 인원들이 평일에 조금씩이라도 분배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긋이 즐길 기회가 늘어날 텐데,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주말에라야 사람 구경하느라 지쳐버리는 기인열전 같은 외출이라도 할 수 있다. 평일에 이곳저곳 함께 다닐 친구는 물론 아이의 친구들을 찾아보려 해도 도무지 시간 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고 느낄 지경이다.


Spiez, switzerland. 평일 낮인데도 놀이터나 공원에서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포기한 내 월급만큼의 돈을 주고 시간을 산 셈이 되었다. 보육 시설에서 아이를 일찍 데려올 수 없는 부모들은 돌보미 이모님께 월급을 주거나 돈 주고 학원을 보내면서 일할 시간을 산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볼 다른 사람에게 줄 월급을 위해 돈을 버는 꼴이다. 다들 시간이 없어 절절매고 있으니 결국 세상에서 가장 비싼 건 시간이 되었다. 내 월급 정도만으로 이 비싼 시간을 마음 놓고 쓰게 된 것이라면, 경제적으로는 이해타산이 맞는 수준을 넘어 이익을 봐도 한참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주 6일 일하던 때엔 주 5일제를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지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주 4일만 일하고 평일 하루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쓸 데 없는 근무 시간을 단축해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 놓고 죽이는 시간 대신 가족이 함께 장을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는 평일 2~3시간을 확보한다면 어떨까. 물론 소득에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이야기다. 이건 곧 일하는 시간은 줄지만 노동의 가치가 높아져서 결국 지금보다 실질 소득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일하지 않는 시간의 단가는 낮아지고 사람들은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다. 자본가들은 펄쩍 뛰겠지만, 현재의 노동 착취 구조를 정상화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충분히 확보한 시간은 삶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두는 엄마들이 늘어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알파걸로 자랐든 잘 나가는 전문직이든 막론하고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말이다. 차기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사망한 세 아이 워킹맘 이야기를 듣고 "아이 키우는 엄마에게 근무시간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근로시간을 임금 감소 없이 단축시켜주는 방안도 검토해봐야 한다"라고 말해 비난에 휩싸였다.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는 조직에서 더욱 민폐인 존재로 전락하길 바라는 것인지, 아빠는 엄마들이 일찍 퇴근한 회사에서 야근하느라 집에선 없어도 되는 존재라는 것인지, 기존 정치인들의 현실 인식은 이리도 안이하다. 평일을 누릴 여유를 갖지 못하는 이 땅의 수많은 남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모두에게 평일을 누릴 권리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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