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위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내가 정말 살아가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면 뭐겠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제이를 키워보니 이게 살아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제이와 함께하면 판타지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세계수가 가득한 생명력이 충만한 세상에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사실 제이가 없더라도 살아감을 느끼고 생명력이 충만한 것이 정상이다. 요즘 시대에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나는 아직도 그 늘어난 수명의 초반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연히 느껴야 할 부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명이 늘어난 만큼 사람들은 더 빠르게 죽음을 준비하는 느낌이 든다. 고로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죽어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제이를 키우면서 느낀 부분도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 느낀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가고 있냐는 질문을 했으면 보기만 해도 살아가는 게 느껴질 텐데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비웃어 줬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엄청 걱정하고 고민하였고 그 외에 요소는 부수적인 관심사였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쫓아다니고 당장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노력해서 얻지 못하면 강하게 실망하고 좌절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았다. 특히,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 불확정적인 추상적인 요소들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노후를 준비하거나 얼른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의 충만한 생명력을 느끼며 내가 강렬히 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어린 시절을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명확한 목표가 없는 수치로만 표현되는 학업, 직업, 자산 등의 짐을 짊어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를 위해서 짊어지려고 했는데 막상 짊어지고 나니 나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남들이 다 해야 한다는 안정적인 삶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러다 잠시 내려놓고 제이를 키우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달려오고 있는 이런 안정적이고 순탄한 삶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어가고 있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지는데 그 죽음을 향해 어떻게 안정적이게 달려갈지만 생각했다. 마치 힌두교나 불교를 믿지도 않는데 윤회를 믿으며 현생을 중요시하지 않게 사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삶에서 만큼은 결론(죽음)보다 과정(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정적인 삶이라는 결과지향적인 삶을 나도 모르게 쫓아가면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에 킥을 해준 제이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제이를 키우면서 굉장히 현실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이는 스스로가 불편하면 울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위험을 따지지 않고 돌진한다. 위험해 보여서 우리가 못하게 하면 울어버리고 다시 재도전한다. 그런 제이가 원하는 것에 도착할 수 있도록 우리는 다 같이 고민한다. 위험요소를 제거하기도 하고 제이의 성장을 부지런히 돕기도 한다. 그렇게 제이를 챙겨주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도 명확히 보이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고요하게 마시는 커피가 당겨서 한 명은 제이를 재우고 한 명은 커피를 사러 간다. 작전이 성공했을 때 느껴지는 커피의 맛은 단순히 시고, 쓰고를 떠나서 복잡하고 강렬하다. 마치 어렸을 때 학교에서 진행한 첫 받아쓰기 시험에 100점을 맞아 부모님께 칭찬을 들은 맛이다. 이제 혹시 모르는 미래를 위해 단순히 돈만 많이 벌어놔야 하는 작업이나 필요하지 않은 수치를 위해 효율을 올리는 작업은 더 이상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물론 해당 작업을 안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이와 함께하며 그 작업을 왜 해야는지 어떻게 해야는지가 달라졌고 좀 더 즐기기 시작했다.
즐기기 시작하니 우리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하루는 작게 잡아도 제이가 없던 과거의 최소 5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행성마다 중력이 다른 것처럼 아이의 유무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제이가 우리 품에서 최소 10년을 살아간다고 하면 10년을 50년처럼 살게 해 주므로 작게 잡아도 40년을 더 살게 해주는 것과 같다. 불로불사를 추구하려고 온갖 것을 찾아다녔던 진시황이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현실을 충실히 즐기기만 해도 엄청난 수명을 가질 수 있는데 진시황은 그 약을 찾으려고 신경 쓰느라 얼마나 수명이 줄었을까?
신기하게도 우리는 죽음이 명확하면 오히려 살아가게 된다. 반대로 명확하지 않으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삶을 소중히 하지 않고 죽어갈 준비를 하게 된다. 항상 우리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나의 소중한 아이와 같은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걸까? 해당 부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것은 제이가 충분히 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하고 어떻게 안정적인 삶을 살지 빨리 걱정한다고 들었다. 분명히 필요한 걱정이지만 그 걱정이 그 아이들의 삶을 부여잡고 휘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걱정으로 일찍부터 죽어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너무나 안타깝다. 내게 이런 깨달음을 준 제이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갈 수 있도록 아빠가 노력해야겠다. 우리 가족이 탄 다인승 자전거의 페달을 먼저 부지런히 밟고 있으면 준비가 된 가족들도 다 같이 밟아주겠지. 가볍게 빠르게 달려갈 그 순간을 기다리며 아빠는 먼저 열심히 살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