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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Oct 22. 2023

2. 뒷간에도 희망이 있다

-뒷간 지키는 아이

할아버지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밥때가 되면 할머니의 부탁에 아버지는 온 동네를 뒤지며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마을 정자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 가락을 뽑고 있었다 한다.

 땅뙈기 하나 없는 농사꾼, 농사보다 음주가무를 더 즐기는 농사꾼. 그러니 책 좋아하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주경야독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는 2시간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고개를 몇 개 넘고 불어난 강물을 헤엄치고 뱀한테 물리기도 하고. 책보를 가슴에 둘러메고 매일 새벽 먼 등굣길 떠났던 아버지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어린 장수의 모습을 닮았다. 

할아버지는 농토도 없으면서 장남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아버지의 고교 진학을 반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낮에는 미군 부대에서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서울의 야간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들어갔다. 


사촌들은 초등학교도 변변히 마치지 못한 고향에서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학 중에도 도시에서나 보는 문예 잡지를 구독하던 아버지의 학구열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취직을 하자 고향 식구들은 서울로 올라와 달동네 판잣집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몇 년을 교제하면서도 한 번도 집에 엄마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시부모가 사는 집을 구경도 못하고 식을 올렸다.  


박봉으로 서울 변두리에 집 한 칸을 마련했을 때 아버지는 인생의 절정을 맛보았다. 빚투성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셋방이 아닌 ‘자가’를 장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수성가가 초라해진 건 어느 날 미국에서 귀국한 먼 친척 아저씨 때문이었다. 

일찍이 공부대신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오른 친척은 슈퍼마켓을 여러 개 거느린 부자가 되어 있었다. 금의환향하는 기분으로 20년 만에 귀국해 고향과 우리 집을 방문했다. 하지만 출판사에 다니던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은 있는 것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변변한 가구도 없이 사방 벽을 책장이 차지하고 마루에도 책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친척 아저씨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마루로 올라와 둘러보더니 발에 걸린 책 한 권을 툭 찼다. 대단한 책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의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글자가 인쇄된 것은 무엇이나 소중하게 다루는 습관이 있었다. 그 유전자를 타고나서 내가 훗날 작가가 되었는지 모른다.


대학도 나오고 서울에서 성공했다더니 겨우 이렇게 사느냐는 눈빛이 친척에게서 읽혀졌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을 보더니 무시하는 투로 물었다. 

“이 책 다 읽은 건가요?”

책을 장식용으로만 보는 졸부의 수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친척 아저씨를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평생 책 읽는 선비를 목표로 살아온 아버지는 청빈함을 가보처럼 여겼다. 그렇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선 일종의 자부까지 읽혀졌다. 


하지만 친척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나섰을 때 상황은 반전됐다. 마당 구석의 재래식 변소를 가리키는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변소에 달린 나무 문을 열었던 아저씨는 들어가자마자 다시 뛰쳐나왔다. 

“어휴, 냄새!”

코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리는 아저씨의 모습에 우리 가족은 고개를 떨궜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든 말든 재래식 화장실은 순식간에 아버지를 시골 무지렁이로 격하시켜 버렸다. 


“게 있느냐?”

뒷간 안에서 최 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개는 별을 세다 말고 얼른 대답했다. 

“예, 나리. 여기 있습니다.”

“방에 가면 문갑 위에 책이 하나 있느니라. 뒷간에서 쓰려고 내놓은 것이니 가져오너라.”

순간 솔개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귀한 책을 밑씻개로 쓰겠다니, 믿을 수 없었다. 

(뒷간 지키는 아이, p14, 교학사)     


노비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솔개는 나면서부터 최 진사댁 ‘종놈’이다. 어린 나이에도 온갖 궂은일을 다 하는데 그중 하나는 호롱을 들고 한밤중에 뒷간에 가는 주인어른을 앞장서는 것이다.

어느 날, 주인어른은 볼일을 본 후 뒤지를 하겠다며 안방 문갑 위에서 책을 갖고 오라고 한다. 아무리 못 쓰는 책이라도 귀한 책을 뒤를 닦는데 쓴다니. 솔개는 주인어른에게 거짓말을 하고 몰래 그 책을 숨겨 간직한다. 노비이지만 솔개에게는 늘 글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어른의 외동아들인 도련님은 글공부에 관심이 없다. 장터에 가서 풍물패 공연을 넋 놓고 구경하며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다. 심지어 서당에 솔개를 대신 보내 놓고 자신은 풍물패를 따라다닌다.  

솔개는 자유도 없고 구속만이 있는 노비의 신세를 한탄한다. 하지만 한양에서 귀양 온 선비님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고 열심히 글을 배우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다. 역경과 고난에 처하면서도 글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친척 아저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 우리 가족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아저씨가 자랑스레 보여준 사진을 통해 미국에 있는 그의 저택을 구경한 후라 더 그랬다. 파란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에 그림처럼 서 있는 하얀 2층 집에는 차고가 두 개나 있었다.

그로부터 수년 후 아버지는 드디어 미국에 초대를 받아 친척 아저씨의 집에 여행을 가게 됐다. 그때에는 이미 우리도 집을 새로 지어서 양변기 있는 화장실을 갖춘 후였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가 본 것은 우리 집 한 층보다 큰 미국식 화장실이었다. 


마치 로마의 공중목욕탕처럼 가운데 커다란 대리석 거품 욕조가 있고 그 옆에는 방만한 유리 샤워실이, 변기도 두 개나 있는 으리으리한 화장실은 온통 금빛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문득 친척이 아직도 우리 집의 옛날 변소를 기억하고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 아버지의 조카뻘 되는, 친척 아저씨의 아들이 왜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털어놓았다. 아들은 미국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학교를 퇴학당했다고 했다. 남들은 다 유학 오지 못해 안달인 교육의 천국 미국이지만 아들은 일찍이 공부와는 담을 쌓고 말썽만 부렸다. 


돈을 버느라 자식 교육을 등한히 했다고 친척은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배움이 짧아서 자식 농사도 실패했다고 부끄러워했다. 

“나도 어쩌든지 공부를 할 걸 그랬어요.”

아버지는 친척 집에서 머무는 동안 비데가 달린 변기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비데 사용법을 물었다가 혹시 아직도 변소를 쓴다고 생각할까 더 염려되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끝내 변소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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