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 유전자

식은 떡국이 좋은 사람들

by 겨울이

아직 동트기 전의 이른 아침,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주방에 선다. 부모님이 일어나시기 한두 시간 전, 나만의 아침밥을 먼저 차려 먹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엄마가 일찍 일어나 음식을 다 해 놓으면 겨우 일어나 앉아 먹기만 했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만 가끔 솜씨를 부릴 뿐이고, 매일 먹는 반찬을 하는 건 엄마의 일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덧 하루에 몇 시간을 온전히 내 밥을 위해 쓰고 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어제 점찍어 둔 식재료를 꺼낸다. 사둔지 좀 돼 누렇게 변해가는 콩나물은 빨리 무쳐버려야 하고, 마찬가지로 물컹해지려는 두부도 조림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래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장을 본다기보다 무조건 기본적인 식료품을 산 후 이렇게 저렇게 활용하곤 한다.


그런데 가스레인지 위를 보니 냄비 하나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 어제저녁, 엄마가 끓인 후 내 몫을 남겨 둔 떡국이었다. 나는 원래 저녁을 먹지 않는데 엄마는 자꾸만 떡국이 붓는다면서 붓기 전에 먹으라고 성화였다.

“불으면 말 그대로 떡이 될 텐데 무슨 맛으로 먹니. 지금 빨리 먹지, 맛있는데.”


설날이 다가오면 늘 떡국떡 때문에 고민이 생겼다. 조금만 살지, 넉넉히 살지, 마트에서 대충 주문할지, 떡집에서 갓 뺀 것을 살지. 해가 갈수록 주변에선 점점 제사 지내는 집들이 사라져 명절 당일이 돼도 기름 냄새 풍기는 건 우리 집 밖에 없었다. 내 소원은 설날이면 떡국 한 그릇 놓고 지내는 차례였지만 종친회에서 열리는 9대조 할아버지 제사도 빼놓지 않는 아버지에겐 먹히지 않았다.


이번엔 다행히 지방에서 아는 분이 좋은 쌀로 뺀 떡을 한 상자나 보내주었다. 양이 너무 많아 설이 오기도 전에 매일 한 그릇씩 먹어 없애고 있었다. 엄마는 어제저녁에도 고기를 듬뿍 넣어 한 솥을 끓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식은 떡국은 한 덩어리로 엉겨 붙어 떼어지지도 않았다.



스스로 끼니를 챙겨 먹어야 했던 건 스무 살 때부터였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느닷없이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오래전 미국에 이민 가 자리를 잡은 고모네가 유일한 기댈 언덕이라서 방을 얻기 전까지 한동안 그 집에서 신세를 졌다.


해외여행도 대중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TV 영화에서 본 것이 고작이었고 영어도 못하는 데다 나이도 어린 철부지였다. 수십 년 전 한국을 떠난 고모와도 거의 생면부지나 다름없었다. 처음 가보는 미국이라는 나라와 처음 만나는 고모네 식구들, 갑자기 머물게 된 고모네 집 모두가 낯설고 두렵기까지 했다.


어색하고 서먹하기는 고모도 마찬가지였는지 처음 한동안은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한국에선 수험 공부만 했지 집안일은커녕 내 옷 빨래 한번 손수 해본 적이 없었다. 오빠의 딸은 정이 우러나는 조카라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짐덩어리 같았을지 모른다. 심지어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티격태격했다.


그나마 고모네 집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식사 시간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고모는 한식과 미국식을 절묘하게 섞어 늘 매끼를 식당처럼 근사하게 차려내곤 했다. 고모부가 슈퍼를 여러 개 운영해 집안에는 고기와 귀한 식재료로 가득 찬 냉장고만 세 대가 있었다. 식도락가였던 집안 분위기도 더욱 고모를 일류 요리사로 만들어 냈다.


크고 널찍한 미국식 주방에는 가운데 아일랜드 형 전기 레인지가 있었고 대형 빌트인 오븐과 전자레인지가 설치되어 요리하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머리 위로 고급 무쇠 프라이팬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는데 고모는 그것들을 애지중지했다. 백화점에 쇼핑을 가면 늘 유명 브랜드 프라이팬과 조리 기구 앞으로 갔고 수백 불짜리 프라이팬 구경을 그곳에서 다 했다.


“미국에도 방앗간 있는 줄 몰랐지?”

학교 앞으로 이사를 한 후 랭귀지 코스를 졸업하니 어느새 다음 해가 되었다. 고모 말대로 미국에서도 교포들은 직접 뽑은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 알차게 새해를 맞았다. 흔한 게 쇠고기뿐이라 풍덩풍덩 넣은 고기 반 떡 반 끓인 떡국을 고모부는 맛있게 잡수셨다.


“어쩌니. 너무 많이 끓였나 봐.”

손이 커서 뭐든지 넘치도록 만드는 고모다 보니 과연 다 먹고도 냄비 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괜찮아요. 식으면 더 맛있으니까 제가 먹죠, 뭐.”

“뭐? 너도 식은 떡국 더 좋아해?”

내 말에 고모가 눈이 커지더니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떡은 차게 식으면 더 쫄깃해지고 질겅질겅 씹는 맛이 있었다. 불은 라면이나 국수는 질색이지만 같은 이유로 수제비도 식은 후에 한 덩어리가 된 걸 더 맛나게 뜯어먹곤 했다. 미국에 온 후 고모와 처음으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사실 원래 오래 눌러살려고 했던 고모집을 나온 건 뭔가 섞이지 못하고 불편했던 감정 때문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보니 피가 섞여도 공통점이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우린 같은 핏줄이 맞았다. 친할머니 역시 식은 떡국을 좋아하셨다는 집안의 비밀까지 알게 됐다.



간밤에 차게 식어버린 떡국은 굳어져 바닥에 딱 붙었다. 숟가락으로 들쑤시니 손바닥만 한 덩어리가 통째로 따라 올라왔다. 한 입 떼어먹으니 딱딱하긴 하지만 역시나 씹는 맛이 있었다. 차서 배 아플 걱정도 잊고 그 맛에 취해 솥 바닥까지 긁어 다 먹어치웠다.


평생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살았지만 엄마는 이 식은 떡국의 맛을 모른다. 시골 출신도 아니면서 입맛이 없으면 젓갈이니 장아찌를 찾는 엄마를 의아해했다. 원래 엄마와 식성이 많이 달랐다는 걸, 나이 들어서도 동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좀 귀찮지만 내 입맛에 맞는 밥을 스스로 해 먹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최소한 미각에 관해선 나는 아버지 쪽을 닮았다.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아도 거대한 대양을 사이에 두어도 어딘가에서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정을 발견한다. 다 식은 떡국을 앞에 놓고 오랜만에 희미한 기억 찾기를 했다. 사소하고도 놀라운 핏줄 찾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