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헤는 방] 입이 없는 인형

헬로키티

by 리하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는 더 그랬다.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은 못 하는데 얼굴 표정으로는 다 드러냈다. 말로 하면 될 걸 표정과 몸짓으로 드러냈으니 얼마나 주변 사람들이 힘들었을까.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살 생일선물을 사러 마트에 갔는데,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소니의 새 줄 이어폰, 48색짜리 색연필 세트 그리고 새로 나온 문구세트가 엄청나게 가지고 싶었는데 그 날은 아니었다. 한 시간 째 입만 꾹 다물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꿋꿋하게 참아주던 엄마가, 결국 폭발했다.


"그냥 일단 이거 사."

엄마가 옆에서 바로 집어서 내민 건 얼굴 모양 헬로 키티 쿠션이었다. 앞 면은 복슬복슬하고, 뒷 면은 극세사로 무측 부드러웠고, 크기는 베개 정도였다. 키티의 오른쪽 귀에는 극세사 재질로 된 커다란 핑크 리본이 달려 있었다. 옆에 있던 동생은 나와 엄마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 마디 보탰다. "그래, 그래. 이거 괜찮다."


물론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 멍청하게 생긴 베개만한 키티 인형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인형답게 폭신한 면이 있어서 한두 번 안아보기는 했다. 역시 포근함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키티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다가, 문득 키티에게는 입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검색을 해 보니, 키티는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을 투영해서 보여주라는 뜻을 담아 입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기쁘면 기쁘게, 슬프면 슬프게 보이는 게 키티라는 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나는 키티가 조금 더 좋아졌다. 내가 뭘 해도 얘는 받아줄 것 같았달까. 내가 학교를 다녀오면 키티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침대 머리맡, 베개 옆에서.


매일 베고 껴안고 자느라 몇 년만에 너덜너덜해진 키티 인형을 고등학교 기숙사에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낡고 헤진 키티를 내 이층 침대 위에 꺼내놓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나처럼 다 찢어져가는 곰돌이 푸 담요를 가지고 온 친구가 있길래 나도 용기를 내어 서랍장에서 키티를 꺼내 침대에 올려 두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키티의 리본은 너덜해졌고, 구멍이 나서 솜이 새어나왔으며, 눈가와 수염을 담은 자수들에는 보풀이 생겼다. 조금씩 키티를 보내 줄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이 몸으로 느껴졌다.


대학생이 된 나는 키티를 잊어버렸다. 키티 대신 대학 동기들이, 남자친구가,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이 키티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우연히 본가에 갔을 때 발견한 키티의 솜은 축 늘어져서 조각조각났고, 리본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키티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입 없이 묵묵하게 나의 모든 말들을 들어줄것만 같은 얼굴 말이다. 어렵고 힘들 때 꼭 끌어안으면 내게 힘이 되어 주었던 키티. 인형 하나가 내게 준 묵묵한 위안이 다시금 떠오른 순간부터, 나는 다시 키티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 모니터 앞에는 선물받은 작은 키티 피규어 한 개, 키티 딸기 에디션 마스코트, 천사와 악마 마스코트 인형이 놓여 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문득 이 키티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표정에서 입과 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키티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내 헬로 키티는 묵묵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투영하며 자리를 지켰다:


새 인형이 유독 사고 싶어질 때는 내 마음이 외로울 때였다. 괴로워서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을 때, 키티 인형과 볼펜을 사 모았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인 키티들을 쭉 줄세워 모니터에, 책상에, 가방 속에 여기 저기 두었다. 키티마다 그 나이의 내가 겪은 어려움들이 하나씩 서렸다. 앞으로도 키티는 계속해서 늘어나겠지만, 새 키티를 모으는 즐거움도 함께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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