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쟤랑 친구 아닌데요.”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쉰다. 친구가 아니어도 같은 반 학생으로서 존중은 해야지. 나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그래도 그땐 동갑이면 다 친구라고 불렀던 것 같다. ‘쟤’와는 친구가 아니라는 어린이의 당당한 말에 어이없다가도,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갸웃한다. 아, 어쩌라는 말인가.
몇 년 사이에 ‘친구’관계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오은영 박사님은 방송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같은 반이라고 모두 친구는 아니라고. 영어로 같은 반 아이는 ‘classmate’, 친구는 ‘friend’로 구분한다며, 아이들에게 이 차이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박사님께서 설명해주시는 내용을 우리 반 아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니. 시대의 흐름에 혀를 차며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를 입력한다. 동갑이라고 다 친구는 아닌 거구나.
식탁에 앉아 요새 어린이들의 당돌함에 대한 푸념을 이어가다가, 문득 냉장고에 붙어 있는 마그넷을 응시한다. 마그넷은 나를 순식간에 10년 전 어느 날의 예술의 전당으로 데리고 간다. 그날따라 날씨가 더워서, 바로 전시장에 들어가지 않고 일단 앉을 곳을 찾았다. 의자는 3인용이었고, 나는 모든 한국인이 그렇듯 가운데 자리를 비우고 왼쪽 끝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숨을 골랐다. 갑자기 내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휴대폰 화면이 눈 앞에서 반짝였다.
“둘 중에 뭐가 더 예뻐요?”
전시회 굿즈샵에서 찍은 마그넷 사진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사진을 들여다보고 신중하게 생각했다. 저는 이거요. 손가락으로 하나를 콕 찝어 가리켰다. 내게 말을 건 여성은 웃으면서 답했다. 두 마그넷 중에서 뭐를 골라야 할지 몰라서 아직 못 샀다고. 그래서 물어봤다고 했다. 나는 전시가 어떠냐고 물었고, 그 분은 전시 감상 후기를 솔직하게 풀어냈다.
마그넷으로 시작한 대화는 그녀의 아들이 군대에 가 있다는 얘기까지 이어졌다. 그 분은 40대 중반이었고, 아들이랑 같이 전시를 보러 오고 싶었는데 영 이런 곳에 같이 와 주지 않는다며 아쉽다고 했다. 나는 오늘 왜 이 전시를 보러 오고 싶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게 10여분의 대화를 마치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시 잘 보고 가세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의자에 그대로 앉아서 방금 내게 벌어진 일을 곱씹었다.
20대와 40대의 대화가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방금 전 대화는 짧았지만 무척 즐거웠다. 동갑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동안 나의 세상을 얼마나 줄여놓았던 것일까? 그동안 내가 놓쳤을 즐거운 대화들을 생각하니 아쉽기만 했다.
그날 나는 전시를 보고, 마그넷을 샀다. 집에 와서 내 인생 첫 마그넷을 냉장고에 붙였다. 마그넷은 내가 그날 깨달은 것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마그넷이 하나씩 쌓여갈수록, 나의 대화 내공도 늘어 갔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먼저 말을 붙여보았고, 친구의 조건에서 나이는 지워 버렸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 세상은 더 넓어졌다. 역시 아이들은 항상 내게 깨달음을 준다. 같은 반이라고, 동갑이라고 다 친구는 아닌 거였다. 나이가 다르다고 친구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
: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 가깝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마음 먹으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왜 나는 동갑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까지 동갑이 아니라는 이유로 흘려 보낸 수많은 친구들을 떠올린다. 앞으로 새로 만날 수많은 친구들을 상상한다. 당당하게 외치던 우리 반 어린이가 떠오른다. “저 쟤랑 친구 아닌데요.” 네 말이 맞았다. 인정한다. 너 쟤랑 친구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