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그 작가의 책을 한 권씩 사 읽는다. 최근 몇 년간 읽은 수상 작가 작품 중에서 아주 인상적인 글이 있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노벨 위원회는 2022년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개인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예리하게 탐구한 작가’라고 소개했다. 이런 멋지고 현학적인 표현을 감상할 새도 없이, 나는 재빨리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했다. 주문 후 여유롭게 작가 정보를 검색하는데 이런 연관 검색어가 떴다.
아니 에르노 불륜
알고 보니 <단순한 열정>은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개인적인 기억의 근원’이라는 멋진 수식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작가 이름 뒤에는 불륜이라는 두 글자만이 따라붙었다. 급히 주문을 확인해 보니 이미 책이 발송되어 취소할 수 없었다. 노벨 위원회가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권위자의 오류에 기대어, 일단 읽고 판단해 보기로 했다.
100페이지짜리 얇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나는 잠시도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 글은 작가의 고백이자 회상이자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 쓴 문장의 향연이었다. 불륜을 미화하고 있다는 비난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은 이 사람의 생존 기록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59p.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은 항상 내가 글쓰기를 머뭇거리게 한 원인이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고통에 시달린다. 이미 숙제로 낼 두 편의 글을 완성했지만, 누군가 내 솔직한 이야기를 읽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이 글을 새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썼고, 드러냈고, 비난받고, 사랑받았다. <단순한 열정>은 소재 때문에 프랑스 평단에서도 논란이 됐다고 하니, 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감수하고 이 글을 세상에 내보였는지 나는 가늠하기 어렵다.
살다 보면, 어려운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질투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도 있고,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확신이 없을 때도 있고, 이런 감정을 가진 스스로에게 놀라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정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 열정이 있다는 증거 아닐까? 열정이 있어서 사랑할 수 있고, 나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내보일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담은 글로 열정과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내는 작가들이 내게 용기를 준다.
솔직함으로 내게 충격을 준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이슬아 작가의 글이 그렇다. 에세이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어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 전체에서 ‘살아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이런 솔직함에 열광했다. 이 두 작가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쓰는 것을 목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을 드러냈고, 이 글들은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다.
우리는 왜 솔직한 글에 빠져드는 것일까? 우리는 남들이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낀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면서도 남에게 직접 묻지는 못한다. 그래서 인터넷과 책을 통해서 남들이 쓴 글을 찾아 읽는다. 어디에도 꺼내놓지 못하고 맘속 깊이 구겨 넣은 감정들을 꺼내어 솔직한 문장들로 펼쳐내는 작가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누군가가 읽힐 고통을 감수했기에, 나는 또 며칠 삶을 버텨낼 힘을 얻는다.
아니 에르노를 통해 우리가 이 어렵고 지난한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를 배운다. 사랑, 열정 그리고 글쓰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을 떠올려본다. ‘드러내는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을 내보이는 것. 나는 아직도 이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지만, 이 글을 완성해 메일을 보낸다. 내 잠깐의 고통으로 누군가가 힘을 얻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