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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진기자 이희훈 Dec 06. 2019

매맞던 시설 떠나 내집으로

탈시설 장애인 마로니에 8인 / 홍성호

'마로니에 8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10년 전 같은 이유로 뭉친 이 8명은 입을 모아 자유를 말했다.  

이들은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시간은 인간의 존엄을 무시 당한 채 숨이 붙어 있어 마지 못해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8명은 탈시설 투쟁을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 결정권을 누리며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시설을 떠난 뒤 서울시를 상대로 이어진 62일간의 노숙 투쟁. 휠체어에 앉아 오랜 시간을 견디고, 불편한 잠자리와 소음·더위를 이겨 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애인 시설에서 무시당하고 고통 받았던 시간보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첫 경험이 소중하고 행복했다고 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산 지 이제 만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렇게 독립한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매맞던 시설 떠나 내집으로... 믿어준 형 고마워 



홍성호씨는 10년 전 탈시설 투쟁 당시 자신이 살 집을 얻고 싶고, 말을 못한다고 무시당하지 않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은 현실이 됐다. 부족한 돈으로 이곳 저곳 옮겨 다니기도 했지만 활동지원사의 도움으로 거여동 행복주택에 당첨돼 쾌적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얻었다. 환갑잔치 때 큰형님네와 찍은 가족사진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장치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성호씨는 집이 너무 좋다는 말에 환한 표정으로 '여기서 살다가 죽을 거예요'라고 손짓 몸짓으로 표현했다.  
열여섯 중학생 시절, 성호씨는 친구들과 놀다가 추락사고로 머리를 다쳐 5년간 침대에 누워 지내다가 23세가 되던 해 병원을 나왔다.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퇴원 후 3년이 지났을 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지지자였던 맏형이 성호씨 등 7남매를 돌봐야 할 상황이었다. 성호씨는 형의 결혼에 시설행을 선택했다.  

서른 살에 시작된 성호씨의 시설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상한 음식을 먹는 일이 허다해 설사가 잦았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나체 상태로 몽둥이질을 당하기도 했다. 시설에서 지낸 17년간 성호씨는 장수연으로 불렸다. 시설장이 죽은 사람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장애급여를 몰래 빼돌려 부정수급한 것이다. 반복되는 고통 속에 형의 집으로 도망쳤지만 다시 붙잡혀와 매질을 당했다. 때문에 손목을 그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성호씨는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석암비대위)'와 함께 재단을 나와 자신의 삶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성호씨는 탈시설로 자립한 뒤 자신의 이름으로 수급통장을 개설했다. 첫 생활 수급비를 받았을 때 감격스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돈으로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해 준 형을 찾아가 술을 대접하고 용돈을 드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샀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좋다고 했다.  


현행법 상 만 65세가 되면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된다. 성호씨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0년 전 62일간 싸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가까워졌지만 또 다른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호씨는 다시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했다. 혼자는 안 되지만 같이 하면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장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하기를 바라는 싸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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