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살의 어린 엄마
"너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란다"
"공부는 꼭 책임져줄게"
중학교 때까지 그녀의 집은 잘살았다. 아버지가 그 동네에서는 꽤나 유명인사였다. 직업을 뭐라 할 순 없었지만, 정장과 구두는 맞춤으로 입었고 집에 있기보다는 주로 밖에서 유흥을 즐겼다. 명절이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일이 당연했다. 하루는 갈비한쪽을 통째로 짊어지고 오는 사람도 몇 있었다.
16년을 부산에서 살았지만, 공부를 나름 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짧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학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60년대의 부산에 사는 동안 논이나 밭, 철길 옆을 살아본 적이 없는 도시소녀는 이제는 단칸방에 살게 되었다. 잠깐일줄 알았던 순간의 흔들림으로 그녀는 다시 학교에 돌아갈 수 없었다.
|여담
엄마는 자신이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많았다.
엄마는 집이 어려워도 대학은 꼭 보내 주리라고 늘 나에게 말했다.
“000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20살이 되자 그녀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지, 짧게 시작한 공부는 한 번에 공무원으로 만들어줬다. 지금은 누구나 전화기를 들고 다니지만 (이제는 전화기라고 부르는 것조차 옛날 일처럼 보인다)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소위 ‘잘 사는 집’이 아니면 전화기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거쳐야 했다. 그녀는 전화 교환원이었다. 전화를 걸어 원하는 지역에 전화선을 꼽는 역할을 했다. 당시 여자로서, 공무원으로 받는 봉급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 덕분에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어린 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여담
“엄마, 태안은 어디에 있어?”
“041이니까, 충청남도지?”
지명을 물어보면 엄마는 막힘없이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전화선을 지역에 맞춰 꼽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엄마는 인간지도가 되었었나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전에 다른 직업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얼핏 듣기는 했지만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전화 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초등학교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진로시간에 사라진 직업에 관해 배웠는데, 그 내용에 있었다. 선생님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직업이라 했다. ‘아주 오래전’이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여 나는 ‘우리 엄마가 그거 했었어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20대 후반이 되자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고갔다. 바쁘게 살아온 그녀는 마침 잡힌 선자리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외적으로는 별로였다. 그래도 주변 사람에게 하는 모습에서 ‘그래도 가정은 잘 지키겠다.'라고 생각했다. 29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에 신부가 되었다. 둘이어서 외롭지는 않았지만, 힘은 조금 들었다. 퇴직금으로 결혼을 준비한 그녀는 직장을 놓았고,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되었고 큰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정된 직장은 구하지 못했다. 천원 한 장 쓰기가 망설여졌고, 여전히 단칸방을 벗어날 수 가 없었다.
여유는 조금씩 생겼지만, 부부사이가 좋으면 아기가 늦게 생긴다는 말처럼 30대가 끝나가지만 여전히 둘뿐이었다. 생기면 생기는 대로, 생기지 않으면 그런대로 살자라는게 둘의 생각이었다. 43살,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의 딸과 아들들이 중학교 교복을 맞출 동안, 그녀는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춥지만 둘에게는 따뜻한 겨울, 딸아이가 태어난다.
“너는 엄마에게 아름다운 정원이야”
그렇게 우리 엄마는 43살의 많은 나이에 어린 엄마가 되었다.
|여담
어렵게 살았지만, 엄마와 아빤 행복을 놓지 않았다. 가끔씩 엄마는 아빠랑 같이 차를 타고 대전 엑스포에 놀러갔던 일들을 말해준다. 차에 밥솥과 김치 한포기를 실어서 단출하게 떠났다고 했다. 그러면 며칟날을 밥해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 엑스포 줄을 섰다고 했다. 그때만큼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엄마의 얼굴에 웃음을 준다.
사실 엄마와 아빤 아기가 생기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아빠 친구들이 아빠가 메뚜기를 많이 먹어서 내가 생겼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던걸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둘보단 셋이 좋은거지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