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때문에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입은 옷을 보고 대충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현정과 영연이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리지 않지만, 방금 전 회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좋은 얘기를 나누는 듯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얼굴을 맞붙이듯 가까이 대고 속닥거리다가 자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회관 뒤로 향하던 미윤의 걸음은 멈춰선다. 그러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마치 땅에서 튀어나온 손이 발목을 꽉 잡는 듯했다.
저들의 대화가 궁금하다. 연못 마을을 끔찍하게 아끼는 현은이나 연못이 마르면 사람이 죽는다고 말하는 임순희 어르신이 듣기에 불편하고 불쾌할 이야기를 할 게 뻔하다. 그렇다는 건 내 귀엔 달콤하게 들린다는 뜻이 된다.
옷차림으로 보아 현정으로 보이는 사람은 말을 이어가며 간혹 연못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팔을 길게 뻗는 것도 아니고, 팔짱을 낀 상태에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수준이다.
작은 움직임에도 그가 연못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건, 마을 입구에 왼쪽 몸을 보이고 서서 오른쪽으로 검지를 뻗었을 때 있는 건 오로지 연못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마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은 이장네와 큰길을 마주 보고 있는 회관뿐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대화에 끼워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몸을 숨기고 귀를 세우는 방법이 최선인데, 여긴 그럴만한 자리가 없다. 회관 건물을 마지막으로 마을 입구까지 향하는 길은 텅 비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의 몸을 숨길만한 커다란 나무도 없고, 쪼그려 앉아서 몸을 억지로 모아 숨을 커다란 쓰레기통도 없다.
미윤이 회관 앞도 뒤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서 마을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영연과 대화하던 현정이 다시 검지를 펴고 연못을 가리킨다. 그러더니 연못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부옇게 떴지만,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다. 예상컨대 아주 당혹스럽단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쭉 편 검지를 바로 접고, 앞에 선 영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무슨 말을 속닥거린다. 그러자 이번엔 영연 또한 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빠르게 자리를 떠난다.
다른 때였다면 이리 가까이 오라고 불러서 무슨 말을 했는지 구구절절 알려주었을 게 뻔한데, 저렇게 본 사람도 못 본척하며 바로 흩어지는 모습이 이상하다. 꼭 꿍꿍이라도 있는 느낌이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봐도 알려줄 리가 없다는 걸.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옆에서 듣고 싶었단 뜻이지, 굳이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 물어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근거는 없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저들이 무슨 대화를 했을지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이 올 거란 예감도 들고.
한 시간 뒤에 만나자던 희운은 십 분 전에 도착한 미윤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고 화낸다.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나왔으면서도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대꾸하기도 귀찮고, 화를 내는 그도 지금 자기가 억지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거다.
낡은 트럭은 시동 거는 일만 한참이 걸린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익숙하지만 듣기 어색한 트로트가 나온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노래를 섞어서 두 배속으로 늘린 거다.
그 이상한 음악이라도 있으니 숨 좀 쉰다. 희운은 차창을 열고 뻑뻑 담배를 피워댄다. 같은 흡연자도 코가 아플 지경이다.
아내와 싸워서 기분이 상한 건 알겠는데, 그걸 꼭 이렇게까지 티 내야 하나? 미윤은 이래서 이 마을이 싫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어떤 일로 기분이 상했다면 어린 사람이 무조건 그를 달래야 하고, 토닥여야 하고, 어른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살다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순간이 있지만, 그걸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하려고 하면 이장의 기분에 맞춰 어영부영 춤이라도 출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에너지 낭비하고 싶진 않다.
차라리 조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하지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자꾸 차 안에서 맴도는 담배 연기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면서 최대한 얼굴을 붙여 밖을 향하도록 했다. 집에 올 땐 힘들더라도 버스를 기다려서 따로 와야겠단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