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by 이홍

하지만 나는 들어가서 변기에 앉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성질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현은이 다가와 닫힌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렸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뭐가 문제일까?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문을 세게 두드리면 어쩌자는 걸까? 그 소리에 놀라서 넘어지거나 스마트폰이라도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네, 금방 나가요.”

제일 슬픈 건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일단 연못 마을에 온 이상 저 사람은 웃어른이다. 집을 팔아버리기 전까지 얼굴에 침뱉고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거다.

게다가 이 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건 현은이 아니라 미윤이다. 아무리 짜증 부리고 성질내도 최대한 받아주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는 거다. 벌어지는 상황이 모두 내 뜻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꼬일 필요가 있는지.

부랴부랴 손에 쥔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사용하지 않은 변기 물을 내린 다음 물에 대충 손을 닦는다. 수건 걸이에 수건이 있지만 옷에 물기를 닦는다. 낡은 건 쓰기 싫다. 그것도 조금 낡아야지, 미윤보다 나이가 많았던 동네 사람의 백일 잔치 수건을 누가 쓰고 싶어 하겠는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현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변해있다. 어지간히도 화가 났는지 잘하면 발을 쾅쾅 구를 기세다. 마음 속에 감춰도 되는 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술 밖으로 줄줄 흘러내린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 시어머니 무덤인데 싹 없어지면 좋겠다고? 패륜도 저런 패륜이 없지.”

미윤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마음에 후다닥 자리를 비킨다. 그동안 정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꼭 돌아가신 그의 시어머니 무덤을 들먹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돈 많아서 남 눈치 안 보고 그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사람이니까 눈치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곧 폐업하는 가게에 가서 어차피 가게 문 닫는데 안 팔리면 다 안고 가야 하는데, 그게 더 손해 아니냐고 물건값 깎아주기를 요청할 듯하다.

화장실 문이 쾅 닫힌다. 너무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곧바로 문고리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영연에게 손가락질 하던 희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손을 숨긴다. 현정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거란 생각은 못 했지만, 나쁘지 않다. 이제 싸움을 잠시 멈춘 이장 부부만 나가면 된다.

그러나 영연은 눈치 없이 미윤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오늘은 식사 못 챙겨주겠네. 미안해서 어떡하나? 이장님이 시내 나갈 일 있다고 하니까 차 얻어 타고 가서 밥 먹고 와.”

남편이 아니라 이장님이라고 말한다는 건 제대로 빈정 상했단 뜻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단 사실을 깨닫는다. 나가서 밥을 먹기엔 수중에 현금이 부족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식사 구걸하긴 싫다. 차라리 숨 막혀도 이장과 같은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게 나은 선택이다.

걱정인 돈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지 않고선 방법이 없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요동치는 뱃속 때문에 다른 방향을 생각하기도 어렵다.

평소였다면 마음씨 좋은 사람처럼 가장하고 그러라고 말했을 희운이지만, 지금은 천장을 보고 짜증을 식히다가 영연의 말을 듣고 이쪽을 향해 큰 소리를 지른다.

“그걸 왜 여편네 마음대로 정해?”

영연은 반응하지 않고 회관 밖으로 나간다. 희운은 버럭 화를 냈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영연에게 마음이 꼬여 하는 행동마다 전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물고 회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신발을 구겨 신으며 바닥을 향해 말한다.

“한 시간 뒤에 나와.”

그 사이 화장실에서 나온 현은은 갓 물기를 닦아낸 말간 얼굴로 미윤의 어깨를 밀치고 회관 밖으로 나간다. 갑자기 확 밀쳐진 탓에 옹기종기 모인 실내화를 밟아가며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현은의 뒷모습을 보며 욕을 쏟아내고 싶은 욕구가 치밀지만, 그보단 괜한 감정 낭비 하고 싶지 않단 마음이 크다.

담배 말린다. 미윤은 이 말을 참 싫어했다. 자신도 흡연자이긴 하지만, 도대체 담배 말린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부 허세에 찌든 말처럼 들렸다.

오늘 처음으로 그 기분을 느낀다. 정말이지 담배가 너무 간절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았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게 모여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진저리가 날 필요가 있을까?

웩. 각자 자신의 집으로 사라진 마을 주민들을 보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쭉 내민다. 몸을 부르르 떨던 미윤은 가방 속에 쑤셔 넣은 담배를 찾으러 회관 안으로 들어간다.

어쨌거나 시내에 나가게 됐으니 필요한 물건을 사올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기가 찬다. 이래서 카드를 자를 때 스마트폰에 저장된 카드도 다 지워야 했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다른 물건이라니.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도 일단은 이 연못 마을 회관에 있는 물건을 잘 써야만 한다. 하나 사게 되면 다른 게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부족한 것들이 끝도 없이 몰아친다.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만, 미윤은 거의 빈 담배곽을 잡으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닫는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해가 쨍쨍하게 떠 있다. 여름은 늘 이 모양이다. 이른 시간부터 해가 떠서 사람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안개가 가득 들어찼는데, 거기에 눅눅함까지 더해지니 없던 짜증도 뱃속부터 치밀어 오른다.

미윤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된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려고 멀리 가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내 나이가 몇인데, 담배 피우는 일로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회관 뒤에서 피자. 밖으로 오갈 때 편하게 신으라고 준비된 슬리퍼가 있지만, 꾸역꾸역 운동화 뒤꿈치까지 완벽하게 발을 넣고, 회관 뒤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때 마을 입구 쪽에 모여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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