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삶과 반전운동가가 되어야 했던 이유
아이를 지키려는 여인의 모습이다. 품 안에서 웅크린 아이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있다. 아무런 색조도 없이 단조롭고 투박한 이 석판화 속 여인은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떤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감싸 안은 그녀는 아이들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을까? 우리의 바람은 자주 빗나갔다.
그녀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이 작품을 만든 케테 콜비츠는 그랬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그녀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이러하다. 큰 손자 페터가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해 허망하게 죽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다. 이미 28년 전 그녀의 둘째 아들 페터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징집되어 죽었다.(손자의 이름은 죽은 아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지었지만 공교롭게도 둘 다 전쟁통에 사망했다.) 전쟁은 그녀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앗아갔다. 심지어 전쟁 통에 그녀의 집마저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잿빛이었다.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전투기가 돌아다니는지 확인해야 했다. 평범한 일상은 여러 번 겪었듯이 언제나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닥친 비극은 형벌과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평생 그녀의 삶을 괴롭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하게 일궈왔던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 상실에 큰 절망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반전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전쟁은 사랑하는 이들을 앗아가고, 삶의 의욕마저 빼앗아 갔다. 반면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로 차올랐다. 인간성마저 파괴시키는 이 잔인한 전쟁을 막아야 한다. 더 이상 무구한 아이들이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명 이리라. 잿빛의 세상을 표현하기에는 단지 한 가지 색이었으면 충분했다.
불행한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이런 일을 겪기엔 그녀와 가족들은 너무 선하디 선한 사람이었다. 그녀 가족들은 늘 이웃들과 어울리고자 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이를테면, 법관이었던 아버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미장이가 되었고, 의사였던 남편은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고, 예술가였던 그녀는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판에 힘껏 새겼다.
세심한 표현이나 화려한 색상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토록 어머니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다니. 오히려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현실의 어머니처럼 말이다. 어머니는 화려하거나 젊지 않다. 삶의 길이만큼 마모되고 훼손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한다.
나의 어머니는 51년 생이다. 여수 돌섬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는 갓 스무 살 때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미싱공장에서 시다로 일을 하며 기숙 생활을 했다. 그 해에는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몸에 불을 붙였고, 이듬해 크리스마스에는 종로 대연각 호텔에서 큰 불이 났다. 스무 살의 소녀는 봉제 노동자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연고도 없는 대구로 시집을 와 삼 남매를 낳았다. 내가 어린 시절 청소부, 파출부 일을 했다. 그땐 부끄러웠다. 아직도 나와 만나면 티격태격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불완전 존재이지만, 아들에게는 완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