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은 왜
유비를 선택했을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5장 유비 (3)

by 이현민

7년 기다림의 결과



조조(曹操)가 중원을 안정시키고 허도(許都)의 조정을 통해 새로운 제국 운영체제를 공고히 하던 관도대전(官渡大戰) 이후 7년의 시간은, 신야(新野)의 유비(劉備)에게는 기다림과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서주(徐州)에서의 부침을 뒤로하고, 형주(荊州)의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유비는 자신을 회복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주 정치권 내의 계속된 대립은 유비가 기대했던 기회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운영체제를 바탕으로, 제국의 시스템을 재건한 조조를 보며, 유비의 인내심이 초조함으로 바뀔 무렵, 유비는 지역의 명사였던 사마휘(司馬徽)를 통해 양양(襄陽) 근처에 은거하던 제갈량(諸葛亮)을 소개받게 됩니다. 당시 유비 세력은 문무의 인재들이 모여 높은 수준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역량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행할 운영체제의 설계자, 즉 아키텍트(Architect)가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이러한 유비 세력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왜 천하를 삼분(三分)해야 했을까?



유비는 직접 제갈량을 찾아 자신의 진영에 합류할 것을 권하게 되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알려진 융중대(隆中對)를 설명합니다. 그는 유비에게 형주를 완전히 확보함으로써 한(漢) 황실을 부흥할 수 있는 실력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후 익주(益州)를 확보함으로써,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확장함과 동시에 남서부와 중부에서 중원을 향한 압박전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손씨(孫氏) 가문이 동쪽에서, 유비가 익주와 형주에서 각각 장안(長安)과 허도를 향해 군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제국 시스템의 핵심인 중원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 제갈량 융중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곧 유비가 추구하던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정치적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계획임과 동시에,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지도 12. 융중대(隆中對)


다만 이 전략의 첫번째 핵심은 형주, 특히 형주 북부에 대한 완전한 확보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형주의 경우 남북 간의 인구 및 경제력 격차가 큰 지역이었습니다. 중원에 인접한 형주 북부, 즉 남양군은 중원 지역 못지않은 인구와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남부의 경우 여전히 개발이 미진한 상황이었기에 융중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형주 북부 확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익주의 경우 유비의 세력 기반을 확장하고, 동시에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위한 거점으로 고려되었습니다.


제국의 핵심 지역인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조조는 예전 후한 제국 국력의 70% 이상 (추정치, 주5-1)을 회복한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확보하는 것을 조조가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형주와 익주의 확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습니다.


융중대의 두번째 핵심은 양주(揚州)의 손권(孫權)이 조조의 통제권 아래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손권이 조조의 중앙정부를 인정함으로써, 허도의 운영체제로 편입된다면, 결국 유비만이 조조에게 대항하는 형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조조의 운영체제가 확장되고, 제국 시스템의 재건이 완료된다면, 조조와 같은 목적을 다른 방식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유비 세력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물고기가 물을 만나다 (水魚之交)



한편 유비의 제안을 받은 제갈량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구상하는 새로운 운영체제을 현실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유비뿐이었습니다. 관도대전 이전부터 허도 천도와 함께 견고한 운영체제를 구축한 조조의 진영, 지방세력들의 연합체인 손권, 유표(劉表), 그리고 유장(劉璋)의 진영은 제갈량이 원하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었습니다.


문무의 인재들을 통한 높은 소프트웨어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과 구조가 부재했던 유비의 세력이야말로, 제갈량 자신이 구상하던 운영체제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에 제갈량은 207년 말 융중을 떠나 유비의 진영에 합류하게 됩니다.


208년 6월, 중원과 북방 경계를 안정시킨 조조는 삼공(三公)을 폐지하고 승상(丞相)의 자리에 오르며, 제국 시스템 재건을 완결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다만, 조조는 무력을 통해 중원을 평정할 당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남서부 지역에 접근했습니다. 넓은 영역에 비해 인구가 적고 개발이 미진한 상태인 남서부 지역에 대해서는, 자원과 시간이 소모되는 군사행동보다는, 제국 시스템의 위엄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통합을 실행함으로써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제국 시스템 재건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첫 통합의 대상으로, 허도로부터 접근성이 높고, 중원 지역 한 주에 필적하는 인구 규모와 경제력을 보유했지만, 내부의 정치상황이 불안정했던 형주를 선택합니다.


그렇게 관도대전 이후 7년이 지난 뒤에야, 조조는 형주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초 조조는 형주를 향해 처음부터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키기보다, 먼저 형주의 반응을 점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후돈(夏侯惇) 등을 통해, 일부 병력을 형주와 중원의 접경지인 신야에 파견한 조조는, 자신의 병력에 대한 유비의 적대적인 대응을 확인한 뒤, 형주에 대해서는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무력을 통한 압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결국 조조는 약 15만에 이르는 대병력 (추정치, 주5-2)을 동원함으로써, 군사적 압박을 통해 형주의 저항 의지를 소멸시키고 정치적 통합을 유도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앞서 조조는 규모만을 앞세운 반동탁제후연합군의 실패를 경험했고, 이후 관도전선에서 대치한 원소군을 격파하며 규모에 기반한 상대의 정치적 압박을 무력화 시킨 바 있습니다. 즉 상대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면 아무리 대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조조가 이번에는 '통합'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형주를 향해 15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출동시켰습니다.


후한 말 13주의 체제속에서 남서부 지역의 인구 및 경제규모를 고려한다면, 형주는 물론, 익주와 양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조조가 선택한 군사적 압박은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운영체제의 혁신을 통해 중원을 재패하고 제국 시스템을 재건한 것처럼, 형주의 제갈량 또한 자신들의 한계를 소프트웨어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갈량은 조조의 15만 대병력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주5-1.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산할 때, 하북과 중원을 평정한 조조는 후한 13개 주 중 9개 주를 확보하며 행정 구역의 약 70%를 장악했습니다. 특히 제국 내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던 기주(약 590만 명)와 예주(약 510만 명)를 포함하여 전체 인구의 약 65% 이상(약 3,500만 명)을 허도 조정의 통제하에 두었습니다. 이는 조조가 제국 시스템을 70% 이상 복구했음을 의미하며, 유비나 손권 등 남방 세력이 보유한 자원을 압도하는 구조적 격차를 확립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5-2.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와 제갈량전(諸葛亮傳)〉의 기록을 종합하면, 적벽대전 당시 조조가 남하하며 동원한 순수 전투 병력은 약 15만 명 내외로 추산됩니다. 이는 당시 조조가 장악한 지역의 총 인구(약 3,500만 명)에서 징집 가능한 상비군 중, 북방 접경지역 방어 및 내부 치안 유지에 필요한 병력을 제외한 최대치에 근접한 규모입니다. 원소가 관도에서 의도했던 바와 같이, 조조는 압도적인 병력규모를 통해 형주의 지방세력들이 자신의 운영체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