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왜
형주를 선택했을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5장 유비 (2)

by 이현민

원소는 왜 유비를 받아들였나?



200년 초, 중원 이북을 평정한 원소(袁紹)는 약 10만 명 규모의 대군을 이끌고 남진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원소와 조조(曹操) 사이에 국지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조조 측의 관우(關羽)가 원소의 주요 장수인 안량(顔良)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원소군의 문추(文醜) 역시 조조군의 역습 속에 패배하게 되며, 원소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는데, 유비(劉備)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소의 진영을 직접 찾아가 의탁을 청하게 됩니다.


처음 원소는 조조에게 의탁했던 유비를 경계한 바 있지만, 서주(徐州)에서의 충돌과 유비가 가진 정치적 중량감을 고려하여 그의 요청을 수락하게 됩니다. 황실의 종친이자 조조에 대항한 전적이 있는 유비의 합류는, 그에게 새로운 정치적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장차 조조와의 전면전이 격화되어 사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경우, 원소는 유비와 같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허도(許都) 조정(朝廷)를 대신하는 제국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예전의 운영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다 실패했던 원소에게, 유비는 다시 한번 그 가능성을 제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유비가 합류한 시점, 원소는 이미 관도(官渡) 전선에서 조조에게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관도전선의 대치 상태가 1년 가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유비는 원소 세력이 가지는 한계를 목도하게 되었고, 자신이 기대했던 기회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도 10. 서주(徐州) 상실 이후 유비(劉備)의 이동경로


200년 가을에 이르러, 유비는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원소 진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여남(汝南)에서 헤어졌던 관우,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과 재회하며 다시금 세력의 핵심을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관도대전이 유비에게 준 선택지



한편 유비가 여남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동안, 관도전선의 대치는 조조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되고, 제국의 핵심인 중원(中原) 전체가 조조가 이끄는 제국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권 아래 편입되게 됩니다. 이는 곧 더 이상 중원이 유비와 같은 인물에게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한 기회을 제공할 수 없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관도대전은 유비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남겨주었습니다.


지도 11. 유비(劉備)의 선택지


첫 번째는 양주(揚州)였습니다.


이전까지 유비와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지만, 양주는 손견(孫堅)과 손책(孫策) 사후, 손권(孫權)이 이끄는 손씨 가문의 세력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역이었습니다. 손권은 지역 호족들과 연합을 기반으로,안정적인 준독립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양주는 지방세력들의 연합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지역 내 기반이 없는 유비가 자신만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양주의 수장격인 손권과의 개인적 친분을 통해 양주의 운영체제에 편입된다 해도, 지방세력의 연합이라는 양주의 시스템 환경은 유비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익주(益州)였습니다.


유언(劉焉) 사후 익주목(益州牧)직을 계승한 유장(劉璋) 또한 유비와 마찬가지로 황실의 종친이었습니다. 다만 고립된 지리적 특성상, 익주는 양주보다 더 강력한 지방세력들이 운영체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익주의 지리적 고립은 장차 유비가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확장성을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익주 역시 유비가 원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향후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유비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도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선택지는 또 다른 황실 종친인 유표(劉表)가 다스리던 형주(荊州)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남서부의 4개주 중 한 곳인 형주의 상황은 양주, 익주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형주 역시 채씨(蔡氏)와 괴씨(蒯氏) 등 지방세력이 매우 견고했지만, 지리적으로 장강 이북의 형주 북부 지역은 중원과의 가까웠고, 양양(襄陽)과 남양(南陽) 등 주요 도시의 인구 규모와 경제력은 중원의 대도시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운영체제를 확보할 수 있다면, 형주 북부지역은 유비에게 중원 못지않은 훌륭한 전략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당시 유표는 60세의 고령이었습니다. 유표에게는 유기(劉琦)와 유종(劉琮)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유비는 황실 종친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조조에게 대항했던 자신의 경력을 활용한다면 향후 형주자사직 승계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201년, 유비는 여남을 떠나 형주로 이동하게 되고, 유표의 요청에 따라 형주 남양군 북부의 신야(新野)를 맡게 됩니다.



7년의 기다림이 가져다 준 기회



하지만 상황은 유비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고령의 유표는 현상 유지에 급급했고, 자사직 승계문제를 두고 유기의 세력과 유종의 세력 간 정치적인 대립은 점차 심화되었습니다. 조조가 중원을 안정시킬 동안, 오히려 형주의 정치상황은 더욱 분열되었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7년의 시간을 신야에서 보낸 유비에게 형주의 정치권, 즉 형주의 운영체제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년의 기다림 뒤에 유비에게 찾아온 것은 그가 기대하던 정치적 기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만의 운영체계를 설계할 역량의 부재로 인해, 거듭된 실패를 경험한 유비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운영체제의 설계자, 아키텍트 (Architect)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