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6장 적벽대전 (1-1)
208년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향해 15만 대군을 출동시킬 무렵, 형주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점차 쇠약해지는 유표(劉表)의 자사직 승계를 둘러싸고 유기(劉琦)와 유종(劉琮)을 중심으로 한 지역세력의 파벌다툼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에 유표는 사후 갈등을 예방하고자 제3의 인물인 유비(劉備)에게 형주자사직 승계를 권유합니다. 그러나, 이미 서주에서 기반이 없는 조직 승계의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으며, 이 시점까지도 형주 지방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유비는 결국 유표의 제안을 고사하게 됩니다.
208년 9월, 유표의 임종과 함께 후계자는 강력한 지방세력, 채(蔡)씨의 집중적인 지지를 받은 차남 유종으로 결정되고, 형주의 운영체제, 즉 실권을 채씨 가문이 장악하게 되면서 유종과 승계 경쟁 관계에 있던 유기는 물론, 유기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유비의 위치 또한 불안정해졌습니다. 이에 즈음하여, 조조의 대군이 형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형주 북부, 중원과의 접경에 위치한 신야를 맡고 있던 유비는 조조의 압도적인 병력 규모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유비는 당시 승계 다툼에서 패배한 유기가 태수(太守)로 있던 강하(江夏)로 이동을 결정합니다.
한편 조조는 큰 저항없이 형주의 주도 양양(襄陽)에 입성하고, 자사직을 물려받은 유종의 영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조조가 유종의 형주자사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형주에 대한 정치적 통합 과정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때, 유비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형주 동부의 강하로 이동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조조는 병력을 출동시켜 유비 세력을 격파할 것을 지시합니다. 보병 위주였던 유비군은 기병 중심의 조조군의 추격을 받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잃게 되지만, 유기가 보낸 수군(水軍)덕에 위기를 모면하고 강하군(江夏郡) 하구(夏口)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비와 제갈량(諸葛亮)은 형주의 상실이라는, 융중대(隆中對) 실현의 첫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양양에서 형주에 대한 정치적 통합 작업이 마무리되고,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이 표면적으로나마 조조가 이끄는 허도 조정을 인정하게 되면서, 이제 조조에게 남은 정치적 통합의 대상은 제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양주(楊州)였습니다. 형주에서의 통합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조조는 양주의 손권(孫權)에게도 서신을 보내, 이어질 정치적 통합에 대해 예고하지만, 조조의 이 서신은 오히려 손권이 조조와의 결전을 결심하게 되는 기폭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허도를 중심으로 한 조조의 강력한 중앙집권 및 관료체계가 구축된 중원지역과 달리, 양주는 여전히 지방세력 중심의 운영체제가 작동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손권의 경우에도, 양주를 완전히 장악했다기보다, 강력한 지방세력 중 하나였으며, 양주의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결성된 지방세력 연합체의 수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양주의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산과 강이 많았던 양주의 지리적 특성은 지역의 인구 및 경제규모 성장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기에, 이 시점까지 손권을 중심으로 한 양주세력은 세력의 유지에 집중하며, 제국의 변화 흐름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6-1). 그러나 조조의 서신은, 그가 추진하는 제국 시스템 재건을 위한 마지막 단계가 양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조조의 서신에 대한 손권의 양주세력은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습니다. 장소(張昭)를 비롯한 고옹(顧雍), 보질(步騭)과 같은 관료들은, 황제를 모신 중앙정부의 승상인 조조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명분이 없을 뿐 아니라, 실력에 있어서도 조조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며, 조조의 통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노숙(魯肅)과 주유(周瑜)와 같은 군 지휘관들은 조조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대립은, 손권의 양주세력이 갖는 구조적 특성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장소와 보질의 경우, 손권이 이끄는 양주의 관료조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둘 다 서주(徐州) 출신이었습니다. 양주가 조조의 운영체제에 편입된다고 하더라도, 관료로서 그들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허도(許都) 조정(朝廷)의 개혁조치로 인해, 지방세력들이 약화된다고 해도, 다른 지역 출신이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장소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은, 제국 시스템을 재건한 조조의 새로운 운영체제를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합당하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고옹과 같은 양주의 일부 지방세력은 양주가 조조의 체제에 편입된다고 해도, 이전 전한(前漢) 및 후한(後漢)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원이 아닌 양주에는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에 따라 자신들의 지방세력 또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손권의 직속이었던 주요 군 지휘관들, 특히 노숙과 주유의 입장은 사뭇 달랐습니다. 이들은 양주가 조조의 체제에 흡수될 경우, 양주 지방세력들의 수장인 손권의 지위는 물론, 군 지휘관으로서 자신들의 지위 또한 위태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당시 손권의 직함은 토로장군(討虜將軍) 겸 회계태수(會稽太守)였고, 양주자사는 유복(劉馥)이 맡고 있었습니다. 비록 손권이 양주 지방세력의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손권을 양주자사에 임명하지 않고, 유복을 양주자사로 임명하여 양주 북부의 합비(合肥)에 부임하도록 함으로써, 손권이 가질 수 있는 공식적인 정치권력의 한계를 제한했습니다.
이에 더해 당시 손권의 권력은 양주의 다른 지방세력들보다 강력했던 군사력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조조의 체제를 받아들인다면, 사병조직 보유를 엄격히 금지했던 조조의 정책상 손권은 자신의 사병조직을 상실하고, 일개 지방세력으로 전락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고, 손권의 군 지휘관들 또한 자신들의 영향력과 위치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조조에 대한 항전을 강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조의 서신에 대한 양주의 이러한 분열 양상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같은 목적이, 양주의 권력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대응방식으로 나타난 셈이었습니다. 양주의 관료들과 지방세력들이 점차 조조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노숙은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 형주의 제갈량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릅니다.
주6-1.
사기(史記) 화식열전 (貨殖列傳)과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양주 지역은 풍부한 수자원에도 불구하고 험준한 산악 지형과 미개척지가 많아 중원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고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리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