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왜 이릉대전의 패자가 되었을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9장 북벌 (1)

by 이현민

형주를 잃고 익주에 고립된 유비



216년 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에 즉위할 당시, 형주(荊州)에서는 관우(關羽)가 형주 북부를 확보하기 위해 수년째 강릉(江陵)을 향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익주(益州)와 형주 남부를 확보하고 한중왕의 자리에 오른 유비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지형으로 인한 익주와 형주의 단절, 확장된 시스템을 가동시키기 위한 운영체제와 역량의 한계, 그리고 형주 남부의 미개발과 지리적 개방성은 당시 유비 세력이 마주한 구조적 불안정성의 대부분을 관우가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더불어 관우가 처한 대외적 상황 또한 여의치 않았습니다. 손권(孫權)은 여전히 형주의 남부, 장강(長江) 이남 지역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위왕(魏王) 조조(曹操)에 의한 손권의 오후(吳侯) 책봉은 관우의 고립상태를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219년 12월, 관우가 전사하면서 유비는 형주 남부를 상실하게 됩니다 (주9-1).


형주 남부의 상실은 유비 세력에게 지역 상실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첫 번째, 유비 세력은 익주라는 요새에 고립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익주는 방어에 용이함과 동시에 외부 진출도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익주를 기반으로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산(祁山), 또는 오장원(五丈原)을 지나 장안(長安)을 거치는 경로, 그리고 무산산맥(巫山山脈)과 삼협(三峽)을 지나 이릉(夷陵), 효정(猇亭)을 통해 형주로 진출하는 경로를 통해야 했는데, 두 경로 모두 익주를 나가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장안으로 향하는 경우 후한(後漢) 이래의 요새들을 지나야 했기에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고, 형주로 향하는 경우 좁은 산길로 인해 대병력의 이동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 만약 익주의 경계를 넘는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패퇴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두 번째, 형주 상실은 익주 내에서 유비 세력의 정치적 위치를 약화시킴은 물론 지방세력의 견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비 세력은 한 황실의 부흥을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동시에 지방세력의 지지를 얻어 형주는 물론 익주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주를 상실함으로써, 익주 지방세력의 관점에서 유비 세력은 익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패한 외부 세력이 되었고, 이는 곧 한중왕으로서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유비에게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허도(許都)에서는 한중왕 유비의 정치적 위치까지 위협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무너진 시스템을 계승한 유비



220년 조조 사후 위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조비(曹丕)가 후한 헌제(獻帝)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선양을 통해 위(魏) 제국을 개국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중국 대륙이라는 하드웨어의 시스템과 운영체제가 공식적으로 위 제국의 시스템과 운영체제로 바뀌게 되고, 이는 곧 한중왕이라는, 한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정치적 위치를 확보한 유비의 위상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위 제국의 황제 조비는 앞서 조조가 구축한 제국과 제후국 간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손권을 오왕(吳王)에 봉하면서 손권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고, 동시에 중앙집권적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지역의 구조적 안정성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주9-2). 그러나 조비의 이러한 조치는 유비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비는 부손(傅巽)과 배잠(裴潛) 등을 익주자사에 임명함으로써, 한중왕으로서 익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유비의 권위를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결국 유비는 사라진 후한 제국 시스템을 대체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221년 4월 스스로 한(漢, 이후 촉한(蜀漢)이라고 칭함) 제국의 황제에 즉위하고, 곧이어 오국(吳國)에 대한 군사행동을 추진합니다.



형주로 향한 유비



당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비가 오국의 영토인 형주로 향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비는 형주를 다시 수복함으로써 익주의 고립 상태를 해소하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기 위한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세력의 확장과 한 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형주, 특히 형주 북부의 확보가 필수적이었고, 만약 이러한 진출로가 확보된다면 익주의 인구와 경제력을 통해 형주를 기반으로 한 중원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규모 군사행동을 통해 유비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인 한 황실의 부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익주 지방세력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습니다. 만약 유비가 익주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익주 세력은 위 제국과 대립관계에 있는 유비를 대신해 위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했을 것입니다. 유비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통해 익주가 유일한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대규모 군사행동을 위해 내부 군사력을 통합함으로써 익주 지방세력이 가진 물리력 또한 제한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형주에 대한 유비와의 대립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조조의 오후 봉작 및 조비의 오왕 책봉을 받아들인 손권은, 후한과 위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과 오국에 대한 조비의 견제를 최소화함으로써 유비와의 군사적 충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주9-3). 촉한이 북으로는 위 제국과의 전선을 마주한 상태에서 동쪽으로 오국과의 전선을 확장해야 하는 위치였다면, 위 제국 시스템 내의 손권은 모든 역량을 촉한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낸 셈 입니다.



이릉대전



222년 유비는 약 5만 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익주 경계를 넘어 형주에 진입하면서 오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합니다 (주9-4). 개전 초기,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 남부의 동서 분할을 제안하며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형주 북부를 향하고자 했던 유비의 입장에서 형주 남서부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촉한군은 이릉을 통해 형주 경계를 넘어 효정이라는 지역에 진입하게 됩니다.


다만, 효정에 진입할 시점, 촉한군은 이미 상당한 거리를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익주의 산악지형으로 인해 기병대를 운용할 수 없었던 촉한의 상황으로 인해 당시 병력은 거의 대부분 보병이었기에, 이미 험준한 산맥을 넘어 장거리를 이동한 유비의 병력은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대규모의 병력이 험준한 지형을 이동하다 보니 당시 촉한군은 대형을 갖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효정에 도착할 당시, 촉한군은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고 대형 또한 재편성이 필요했습니다.


오국의 총지휘관이었던 육손(陸遜)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육손은 개전 초반 유비가 이끄는 병력에게 이릉 일대의 거점들을 내어주며 유비군의 전진 속도를 의도적으로 높였으며, 이를 통해 촉한군의 지휘 및 병참체계에 대한 압력을 높였습니다. 익주에서 형주로 이어지는 산악 지형은, 익주로부터 형주로 진입할 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병력의 대형 유지가 어려워지는 구조였습니다. 촉한군이 빠르게 전진할수록 지휘체계와 병참선에는 과부하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전투력의 저하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효정에 도착한 유비는 육손이 이끄는 오군과의 장기적인 대치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격자의 입장이었던 촉한군은 길어진 병참선으로 인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익주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병력 구조상 당시 형주 남부의 기후로 인한 질병으로 비전투 손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대치가 장기간 지속되고 여름이 다가오자 촉한군은 산림에 요새를 구축함으로써 오군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고자 했는데, 결국 이를 역이용한 육손의 화공으로 인해 유비는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9-5).


효정에서의 패전 이후 유비는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성도(成都)로 돌아가지 않고 익주와 형주 경계애 위치한 영안(永安)에 머물던 유비는 223년 4월, 황제의 자리를 유선(劉禪)에게 물려주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개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유비를 잃게 된 촉한은 국가 시스템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위 제국과 오국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 익주 지방세력들의 갈등, 남중(南中)지역의 내부 불안 등에도 대처해야 했던 촉한. 제갈량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주9-1.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에 따르면, 관우는 219년 번성(樊城) 공략 과정에서 위군 서황(徐晃)의 반격과 손권이 파견한 여몽(呂蒙)의 형주 기습을 동시에 받게 됩니다. 여몽에게 강릉을 잃고 퇴각하던 관우는 결국 임저(臨沮) 인근에서 생포되어 처형됩니다. 이는 관우가 처한 전선이 형주 북부(위군)와 형주 남부(오군)로 동시에 열리는 구조적 과부하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주9-2.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에 따르면, 220년 조비가 위 제국을 개창한 직후 손권은 위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바쳤으며, 이에 조비는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봉하고 구석(九錫)을 하사했습니다. 손권이 위의 책봉을 수용한 것은 장강 이남의 운영체제를 위 제국 시스템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동시에 유비와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오국에 대한 위 제국의 군사적 압박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9-3.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오주전(吳主傳) 및 육손전(陸遜傳)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형주 공략에 나서기 이전부터 조비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적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이릉대전 기간 중 위 제국의 중립을 사실상 확보했습니다. 이를 통해 손권은 형주 전선에 오군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으며, 육손을 대도독(大都督)에 임명하여 전군의 지휘권을 일원화했습니다. 이는 병력이 분산되고 지휘체계가 파편화되었던 관도의 원소군, 그리고 형주 북부와 남부로 전선이 분열되었던 관우의 상황과 대비됩니다.


주9-4.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 따르면, 유비는 221년 7월 오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릉대전 당시 유비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익주의 내부 안정 유지 및 북부 전선 방어를 위해 상당 규모를 잔류시켜야 했다는 점, 그리고 이릉~효정 사이의 산악 진출로가 대병력의 이동을 구조적으로 제한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약 4만~5만 명 수준으로 추산됩니다. 육손전(陸遜傳)에 기록된 오군의 규모가 약 5만 명이었다는 점도 이 추산을 뒷받침합니다.


주9-5.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육손전(陸遜傳)에 따르면, 육손은 촉한군이 이릉에 진입한 이후에도 약 반년 이상 방어에 전념하며 공세를 자제했습니다. 당시 오군 내부에서는 조기 반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육손은 지구전을 고수했습니다. 이후, 효정에서 오군과 대치하던 촉한군은 여름이 다가오자 산림 속에 수십 개의 영채를 연결하는 형태로 진지를 구축했는데, 육손전은 이를 화공의 기회로 삼아 촉한군을 섬멸한 육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