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8장 삼국 (3)
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르기 3년 전인 216년, 허도(許都)에서는 조조(曹操)가 위왕(魏王)의 지위에 오릅니다. 이전 허도 조정(朝廷)내 최고위 관료직인 승상(丞相)의 위치에서 개혁을 이끌었던 조조는, 자신의 행정적인 위치와 더불어, 위국의 왕이 됨으로써, 제국 시스템 내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게 됩니다.
다만, 당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위국의 강역은 이후 조비(曹丕)가 개창하는 위 제국의 강역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조가 왕으로 책봉된 위국의 영토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위국의 강역과 비슷했으며, 위국의 수도인 기주(冀州) 업현(鄴縣)을 중심으로, 연주(兗州) 서북부 및 예주(豫州) 일부를 포함했습니다 (주8-3). 직관적으로 보면, 조조가 왕으로 책봉된 위국의 영토는, 관도대전 이전 조조가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세력권, 즉 연주와 예주 일대에 하북의 기주 핵심부를 더한 범위와 유사했습니다.
반면, 후한(後漢) 제국 13개주를 이어받게 되는 위 제국은, 개국 당시 공식적으로 중국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제국이었습니다. 양주(揚州)는 제국의 신하인 손권(孫權)이 오후(吳侯)로서 다스리고 있었고, 익주(益州) 또한 후한의 신하였던 한중왕 유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후한 제국이 멸망하게 되자, 익주에서는 유비가 제위에 오르면서 한(漢)의 국호를 이어받지만 (주8-4), 위 제국이 진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 전 약 50여년의 기간 동안, 중국 대륙이라는 하드웨어는 위 제국이라는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허도 조정에서 제국의 최고위관직에 오른 조조가 216년 위왕의 자리에 오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제국 시스템과 운영체제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허도에 새로운 조정을 수립한 뒤, 제국 운영체제의 혁신을 위해 개혁을 추진할 당시 조조는 제국 시스템의 기반, 중원(中原)을 확보하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인 바 있습니다. 다만, 제국의 핵심으로 기능할 만큼 인구와 경제력이 높았던 중원지역은, 동시에 여러 군벌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는 곧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력충돌이 불가피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중원의 각 지역들은 장기적으로 무력충돌시 발생하는 비용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수준의 인구 규모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조조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중원의 군벌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게 됩니다. 즉, 당시 중원에서 발생한 조조와 군벌들간 무력충돌은 중원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가치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남서부에 대한 조조의 관점 및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형주(荊州) 북부를 제외한 장강 이남지역과 익주는 지리적 특성과 적은 인구 규모, 낮은 경제력으로 인해, 후한 제국의 통제가 시스템 유지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조조 또한 남서부에 후한 제국의 기조 방향을 공유했습니다. 형주에 대한 통합 당시 대군을 이끌고 양양(襄陽)에 입성한 조조였지만, 앞서 6장과 7장을 통해 나타난 조조의 행동은 당시 그의 목적이 군사적 압박을 통한 정치적 통합이었으며, 중원에서 진행되었던 대규모 군사작전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적벽에서의 패전은 조조에게 자신이 구축한 허도 운영체제의 확장성에 대한 한계를 파악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무력을 통한 남서부에 대한 통합은 높은 비용 대비 실질적인 효과가 중원 대비 제한적이었고, 특히 지방세력들이 중심이 된 남서부의 정치 및 행정체계를 제국 중앙정부가 교체하고 직접 관리하는 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대륙이라는 하드웨어의 다양성과 이로 인한 제약을 파악하게 된 조조는, 결국 제국 시스템 내에서 복수의 운영체제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지방권력의 정치적 위계질서 구축이 선행되어야 했는데, 이는 당시 후한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관직(官職)과 작위(爵位)가 서로 다른 위계 층위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승상(丞相)은 황제가 임명하는 최고위 관료직이지만, 어디까지나 황제의 신하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왕(王)·공(公)·후(侯)로 이어지는 봉작(封爵)은 황제에 이어 별도의 위계 체계를 형성하며, 제후들은 자신의 봉토 안에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주8-5).
따라서, 조조가 아무리 승상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더라도, 지방 제후 권력에 대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직 위계가 아닌 작위 위계에서의 지위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에 조조는 216년 위왕의 자리에 오른 뒤 손권을 오후(吳侯)에 봉하면서 제국 시스템 내 운영체제간 질서를 정립하게 됩니다 (주8-6).
황제에 이어 봉건적 작위 질서에서 두 번째 위치인 왕의 지위에 오른 조조는, 이를 통해 지방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의 상한선을 분명히 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주 운영체제 관리자로서의 조조가 왕의 위치에 있다면, 손권은 물론 북부 접경지역의 이민족들과 일부 지방세력 또한 함부로 왕을 칭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권력 또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그들이 제국의 시스템과 주 운영체제를 부정하고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조조가 한중에서 유비를 향한 군사작전에 실패하고, 이후 유비가 스스로 한중왕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조조가 설계한 운영체제간 위계질서에 균열을 발생시켰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당시 후한 제국은 오히려 황건의 난 직전보다 더 견고해진 시스템과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5년 전 자신이 목표했던 바를 달성한 조조는 220년 위국의 수도 업현에서 자신의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조조에게 중국 대륙에는 후한 제국만이 존재했으며, 손권의 오국은 다른 제후국들이나 변방의 번국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존재했습니다. 한중의 유비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허도 조정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일으켰지만, 중원을 기반으로 한 허도 운영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조조가 삼국 통일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삼국 통일은 성립할 수 없는 명제였기 때문입니다.
주8-3.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및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조조가 위공(魏公) 및 위왕(魏王)으로 책봉되며 하사받은 위국(魏國)의 직할 강역은 기주(冀州)의 위군(魏郡), 하내(河內), 조국(趙國), 거록(鉅鹿), 상산(常山), 연주(兗州)의 동군(東郡), 진류(陳留), 제음(濟陰), 예주(豫州)의 양국(梁國), 초국(沛國) 등 10개 군(郡)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나라의 옛 영토와 지리적으로 유사하며, 위(魏) 제국 성립 이후의 장강 이북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시각적 묘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8-4.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선주전(先主傳)에 따르면, 유비는 221년 제위에 오를 때 새로운 제국을 개창하는 창업(創業)이 아닌, 단절된 한의 계통을 잇는 계성(繼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식 국호는 줄곧 한(漢)이었으나, 한(漢)-위(魏)-진(晉)으로 이어지는 정통 계보를 확립하고자 했던 진(晉)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유비의 정권을 지역 명칭인 촉(蜀)으로 기록했습니다.
주8-5.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실린 위공 책봉 조서에는 "위국은 승상 이하 여러 경과 백관을 두되, 모두 한나라 초기의 제후왕의 제도와 같게 하라(魏國置丞相已下諸卿百官, 皆如漢初諸侯王之制)"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건안 21년(216년) 위왕 책봉 이후 조조는 "천자에게 주청할 때 신하를 칭하지 않으며, 조서를 받을 때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魏王奏事不稱臣, 受詔不拜)"는 예우를 받게 되는데, 이는 승상의 자리에서는 불가능한 법제적 지위 전환입니다.
주8-6.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따르면, 조조는 건안 18년(213년) 위공 책봉 이후 손권을 표기장군(驃騎將軍) 및 남창후(南昌侯)에 봉했으며, 건안 21년(216년) 위왕 즉위 이후에는 손권을 오후(吳侯)로, 요동의 공손강 사후 그 아들 공손공(公孫恭)을 영녕향후(永寧鄕侯)에 봉했습니다. 오환(烏丸)·선비(鮮卑) 등 북방 이민족 수장들에게도 작위를 내려 제국 시스템 위계 내로 편입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