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8장 삼국 (2)
214년, 마침내 익주(益州)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조언에 따라 219년 한중왕(漢中王)이라는 지방권력의 정점에 스스로 오름으로써 자신의 세력과 기반을 관리할 운영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유비가 익주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던 213년, 허도(許都)의 조조(曹操)는 위공(魏公)의 지위에 올라 제국 운영체제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함은 물론, 손권(孫權)을 남창후(南昌侯)에 봉하고, 이어 요동(遼東)의 공손강(公孫康)을 포함 북방 이민족 수장들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제국 시스템 질서를 견고하게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조조의 움직임은 역대 중원을 기반으로 했던 제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앙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중원의 제국 시스템과, 황제를 따르지만 독자적인 지방권력을 인정받는 외부 시스템간의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비의 경우, 조조로부터 지방권력을 인정받기는 어려웠으며, 유비와 제갈량 또한 조조의 인정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권력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내부 체계를 정리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비는 여러 직위들을 받았지만 대부분 실체가 없었으며, 유비 세력의 주요 구성원들인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은 물론, 제갈량과 황충(黃忠), 마초(馬超) 등의 인물 또한 실력에 어울리는 공식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세력의 규모가 커진 만큼,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운영체제가 필수적이었지만, 조조가 재건한 시스템과 운영체제를 활용할 수 없었던 유비는, 제국 시스템의 틀 안에서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익주를 확보한 지 5년이 지난 219년, 유비는 한중(漢中)에서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주요 구성원들에게도 그들의 위상에 걸맞는 공식적인 직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진행된 유비의 한중왕 즉위는 그의 익주 장악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장(劉璋)으로부터 익주목(益州牧)의 자리를 넘겨받았지만, 이전 서주(徐州), 그리고 형주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익주목의 자리가 익주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 유장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했던 익주의 지방세력들 입장에서 외부 세력인 유비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지방권력 보전에 집중했던 유장과 달리, 익주를 중원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유비의 목적은 필연적으로 익주 지방세력의 견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긴장상태는 유비가 익주목이 되었음에도 익주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조조가 위공에 오른 뒤, 손권을 오후로 봉하며 제국 내부와 외부의 질서를 동시에 정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비에게 한중왕 즉위는 익주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운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즉위함으로써, 시스템의 규모에 걸맞는 운영체제를 구축하고, 동시에 자신의 세력 핵심과 지방세력의 구조적 통합을 완성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허도 조정(朝廷)의 운영체제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던 정치적 명분을 훼손해야 했습니다. 또한 시스템의 규모가 급속도로 팽창한 유비의 세력은 그에 따른 필연적인 구조적 불안정성 또한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약 10여년의 시간 동안 빠르게 팽창한 유비 세력의 구조적 불안정성은 크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익주와 형주 남부 지역의 지리적 여건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지리적으로는 고립된 익주, 반면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 많아 경제적으로 취약하면서, 동시에 지리적으로 개방된 형주의 남부는, 유비의 시스템과 운영체제가 두 가지 다른 하드웨어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차이와 더불어 익주와 형주 남부 사이의 무산(巫山) 산맥과 삼협(三峽)은 두 지역의 교류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익주는 시스템 전체의 동력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형주 남부는 여전히 운영체제에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구조적 불안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익주와 형주 남부의 내부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익주목의 자리를 이어받은 유비였지만, 여전히 익주의 일부 지방세력들, 특히 남만(南蠻) 등 지역내 이민족들에 대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주8-1). 유비의 운영체제가 익주 내에서 견고하게 구축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제갈량은 물론, 장비, 조운 등 유비 측의 핵심 인력들은 형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비와 함께 익주 내부의 안정과 통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끄는 한중 정권을 통해 익주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하지 못한다면, 익주가 가진 가능성은 유비에게는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익주의 내부 상황은 당시 유비의 주 세력이 익주에 묶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형주에서 남부의 방어와 북부에 대한 공세를 병행하던 관우에게도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적벽대전에서는 승리했지만, 이후 형주 북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이 시점에 이르러서까지 유비 세력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전선(戰線)의 확장이었습니다. 형주 북부는 물론 한중 등 익주 북부에 이르기까지,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할 당시 그의 세력은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전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유비의 세력은 적벽대전 직후보다 규모가 커진 상태였지만, 형주 동부 (손권), 형주 북부 (조조), 그리고 익주 북부 (조조)로 이어지는 대규모 전선을 관리하기에는 그 역량과 규모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주8-2).
특히 익주의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중원으로의 진출로가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에서, 유비와 제갈량은 한중에 대한 조조의 공세에 대응함은 물론, 중원을 향한 진출로였던 상용(上庸) 등 익주와 중원의 경계지역에 대한 방어에도 역량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의 성장속도를 넘어서는 하드웨어의 확장으로 인해 결국 유비가 구축한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셈 입니다. 특히, 형주에서 공세를 진행하던 관우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지는데,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손권은 곧 형주를 향한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주8-1.
삼국지(三國志) 법정전(法正傳)과 후주전(後主傳)에 따르면, 익주 입성 초기 및 한중왕 직후의 시점에 이르러서까지, 유비의 세력과 지방세력간의 갈등은 지속되었으며, 특히 남중(南中) 지역의 이민족 세력들은 유비의 운영체제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채 잠재적 위협으로 남았습니다.
주8-2.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 양홍전(楊洪傳), 오서(吳書) 노숙전(魯肅傳)은 유비 세력이 직면한 전선 확장의 위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숙전에 나타난 익양 대치 기록은 형주 동부의 외교적 긴장을, 관우전에 언급된 조인·서황·손권과의 동시 대립은 형주 북부 전선의 과도한 확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