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8장 삼국 (1)
211년, 약 3만여 명 (추정치)의 병력을 이끌고 형주(荊州)를 출발한 유비(劉備)는 익주(益州) 북부, 한중(漢中) 인근의 요새인 가맹관(葭萌關)에 주둔합니다. 다만, 당시 유비의 목적은 한중의 장로(張魯)에 대한 견제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가맹관에 주둔한 상황이었음에도, 유비는 자신의 정치적 명성을 활용하여, 익주 내 자신의 인지도를 구축함은 물론, 지역세력들과의 관계 또한 강화해 나갔습니다. 한편, 장송(張松)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의 가맹관 주둔을 허락했던 유장(劉璋)은 유비의 움직임이 점차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자, 유비의 목적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익주목(益州牧)이었던 유장의 입장에서 한중의 장로는 익주의 안정을 해치는 위협이었습니다. 이 경우, 익주목으로서 유장은 허도(許都)의 조정(朝廷)에 상황을 설명하고, 상황이 심각해질 경우, 병력 파견 등의 조치를 요청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허도에 도움을 요청할 경우,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익주로 확대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지방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유장은 당시 남아있던 몇 안되는 군벌 중 하나이자, 몇 년 전 적벽(赤壁)에서 조조(曹操)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유비를 활용해 장로의 위협에 대응하기로 결정합니다. 마치 용병을 고용하듯 유비의 익주 주둔을 허락했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유비의 행동들은 통해 결국 유장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12년 말에 이르러, 유장은 유비를 익주에 끌어들이자는 제안을 한 장송을 처형함과 동시에 유비에게도 익주를 떠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비는, 유장이 요청한대로 익주를 떠나 후일을 기약할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형주 남부 4군은 여전히 개발중이었고, 형주 북부를 향한 공세는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비가 익주를 떠나 형주 남부로 돌아갈 경우, 손권이 강릉을 회수한다면 유비 세력의 확장은 거의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형주를 향해 움직인 손권
적벽대전 이후 형주 북부는 조조가 재건한 제국 시스템에 편입되었지만, 남부의 경우 여전히 미개발지역이었고,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영향력, 다시 말해 운영체제가 작동하는 범위 밖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양주(揚州)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손권(孫權)의 입장에서, 형주 남부는 조조와의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비록 강릉(江陵)을 유비에게 빌려주긴 했지만, 손권은 노숙의 조언에 따라 형주 남부를 포함하는 장강(長江) 이남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통합하고자 했고, 이는 유비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익주 정권을 유지하고자 한 유장
황건의 난과 군벌의 충돌 등 중원의 혼란에서 벗어나 있던 익주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관점에서 익주는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리적 환경과 중원 대비 적은 인구 규모, 그리고 서쪽과 남쪽 접경지역 이민족의 존재로 인해 제국 시스템에 편입하기 위한 비용 대비 효과가 낮은 지역이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남서부 통합의 ROI 관점에서, 익주의 중요성은 형주보다 낮은 상황이었습니다. 유장은 익주에 소극적이었던 조조를 향해 형식적으로나마 허도의 조정을 받드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지방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익주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 이상, 유장이 허도와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지방권력을 양보하는 대신 조조의 지원을 받아 익주 정권을 지켜낼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유비는 조조와 손권의 위협으로부터 형주 남부를 지켜야 했고, 차후 익주를 얻기 위해서는 조조와 군사적 충돌을 각오해야 할 수 있었습니다.
익주를 포기할 수 없었던 유비는 213년 초, 가맹관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성도(成都) 북부의 부성(涪城)을 공격하면서 익주에 대한 군사행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앞서 조조가 익주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던 산악지형은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으며, 특히 좁은 길목에 위치한 요새들은 병력 규모의 우세가 제공하는 장점을 희석시켰습니다. 침략자의 위치에 선 유비를 향한 지방세력들의 견제 또한 익주 공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성도로 가는 마지막 요새인 낙성(雒城)까지 진격할 수 있었지만, 이후 1년여 넘는 시간 동안 유비는 성도에 닿을 수 없었습니다.
익주 공략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형주의 제갈량(諸葛亮)은 이후 유비 세력의 운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형주 남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얻을 수 있는 자원, 그리고 익주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노력과 얻을 수 있는 자원을 비교한다면, 결국 지금 유비의 상황에서는 익주 확보가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만, 유비와 제갈량의 입장에서 익주의 지리적 환경은 여전히 장기적인 문제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고립된 지형인 익주의 지리적 환경은 적의 대병력을 막기에 효과적이었지만, 반대로 대병력이 익주를 출발해 중원으로 이동하는 것 또한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나오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보니, 익주에서의 세력 보전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던 유비 세력에게 있어, 중원을 향한 진출로는 반드시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關羽)에게 양양(襄陽) 및 형주 북부에 대한 공세를 지속함으로써, 형주 북부의 요충지와 중원을 향한 진출로를 확보하는 한편, 형주 남부에 대한 공세적 방어를 수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만약 익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관우 또한 양양과 형주 북부의 거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곧 융중대 실현을 위한 완벽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기에, 제갈량은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 유비 세력의 핵심과 함께, 유비를 돕기 위해 익주로 이동합니다.
제갈량과 조운 등이 합류한 유비 세력은 북쪽과 동쪽에서 성도를 압박했고, 214년 결국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하고 익주목의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형주 남부와 더불어 익주까지 확보하게 된 유비는 드디어 일개 군벌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가진 지방권력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 입니다. 그러나, 유비의 익주 점령은 명목상이나마 허도에서 임명한 익주목을 무력으로 굴복시켰다는 점에서 조조가 구축한 제국 운영체제에 대한 도전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조조의 체제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방권력을 인정받고자 했던 유장이나 손권과 달리, 여전히 군벌 시대의 방식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했던 유비의 상황은, 그가 확보한 광대한 지역기반에도 불구하고 유비 세력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