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의 승자는 누구일까?

구조로 읽는 삼국지(三國志) | 제7장 적벽대전 (2-3)

by 이현민

강릉을 빌려 익주로 향해야 했던 유비



적벽(赤壁)에서의 승리를 통해 형주(荊州)를 통합하고자 했던 조조(曹操)에게 큰 타격을 입힌 유비(劉備)는 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 형주 남부의 4군(郡)인 장사(長沙), 계양(桂陽), 무릉(武陵), 영릉(零陵)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근래에 들어 행정구역이 설치될 정도로 개발이 미진한 상태였고 강력한 지방세력 또한 존재하지 않았기에 유비 세력은 비교적 적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광활한 형주 남부 4군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형주 남부 4군은 최소한의 기반 확보라는 의미를 가질 순 있었지만, 제갈량(諸葛亮)이 설계한 융중대(隆中對)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융중대의 첫 단계인 형주 확보는 곧 형주 북부의 확보를 의미한 것이지, 적은 인구와 낮은 농업생산력, 그리고 방어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형주 남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불어 적벽 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 남부를 확보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기에, 손권(孫權)과 주유(周瑜)의 강릉(江陵) 공략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손권은 강릉 공방전에 큰 비용을 지출해야 했지만, 결국 형주 북부를 지나 중원으로 이어지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유비가 형주 남부에 갇힌 형국이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유비와 제갈량은 현재의 고립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손권에게 강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강릉을 확보하기 위해 큰 비용을 지출해야 했던 손권은 유비의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강릉에 대한 방어부담을 덜고, 유비와의 공조를 강화함으로써 조조를 견제할 수 있다는 노숙(魯肅)의 조언에 따라 유비에게 강릉을 빌려주기로 결정합니다. 이를 통해 형주 남부에서의 고립 상태를 벗어나게 된 유비와 제갈량은 곧 익주(益州)를 향한 움직임을 준비합니다.



형주에 남아야 했던 제갈량



때마침 익주에서는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한 장로(張魯)가 세력을 확장하며 유장(劉璋)의 성도(成都) 행정부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비측은 익주의 주요 인사와 접촉하면서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던 중이었는데, 장로의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자 유비와 접촉하던 익주의 장송(張松)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유장에게 조언합니다. 이를 통해 익주를 향해 병력을 출동시킬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유비는 곧 약 3만여 명 (추정치, 주7-5)의 병력을 소집하여 익주를 향해 출발합니다. 다만, 유비의 익주원정군에는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물론 제갈량도 동행하지 않았는데, 여기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부 불안정


비록 형주 남부 4군을 확보했지만, 새로 확보한 지역들은 아직 유비 세력의 기반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당시 유비 세력의 규모로는 광활한 남부 4군의 하드웨어를 관리하기 어려웠으며, 이로 인해 각 지역들에 대한 유비의 통제는 제한적이었습니다. 또한 남부 4군에 대해 조조 또는 손권이 군사적 위협을 가할 경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체계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통제와 방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비 세력의 존재에는 필수적인 형주 남부의 4군이였기에, 제갈량은 형주에 남아 조조가 중원에서 실시한 개혁정책과 마찬가지로, 지역 행정체계 정비, 농업생산성 향상, 그리고 방어 역량 구축의 책임을 맡게 됩니다 (주7-6).


진출로 확보


두번째는 고립상태 해소였습니다. 비록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익주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이는 손권으로부터 강릉을 빌렸기에 가능했으며, 유비가 익주를 장악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전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이나 형주의 유표(劉表)와 달리 익주의 유장은 유비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승계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결국 익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장에 대한 정치적 압박 뿐 아니라, 군사적 압박이 필요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군사적 압박이 필요한 경우가 되고, 익주의 지방세력들이 단결하여 저항한다면, 익주 공략은 당초 계획보다 훨씬 길고 어려운 과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유비의 익주 공략이 빠른 시일 내 성공하기만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결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관우는 형주에 남아 형주 북부의 핵심인 남양군에 대한 공략을 수행하며, 융중대의 첫 단계 실현을 위한 형주 북부 확보를 추진하게 됩니다.


익주행에 대한 유장과 손권의 오판 가능성 최소화


세번째는 유비의 익주행에 대한 유장과 손권의 견제와 오판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비 세력의 주축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이 모두 익주를 향해 움직일 경우, 이는 유장으로 하여금 유비의 목적에 대해 의심을 갖도록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손권에게도 형주 남부를 포기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유장과의 불필요한 긴장과 손권의 적대 행동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유비의 익주행은 유장을 도와 익주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에 부합하는 인적 구성을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제갈량과 유비는, 관우, 장비, 조운(趙雲) 등 세력의 핵심인력들을 형주에 잔류시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적벽대전의 승자는 누구일까?



조조


유비와 손권의 연합은 조조가 적벽에 구축한 수륙방어선을 무너뜨림으로써, 형주를 시작으로 남부 전체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고자 한 조조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벽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형주의 핵심인 북부지역을 지켜냈으며, 이는 곧 조조가 자신이 이끄는 허도의 중앙정부를 통해 예전 제국 국력의 약 80% 수준 (인구 및 경제력, 추정치, 주7-7)을 통제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유비


비록 적벽에서는 승리했지만, 융중대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될 형주 북부를 놓친 유비는 익주 원정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아직 세력 기반과 조직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추진된 익주 원정은, 여전히 소규모였던 유비의 세력이 분산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익주를 확보하기 위해 떠나야 했던 유비, 그리고 형주 남부를 안정시키고 동시에 형주 북부를 향해 움직여야 했던 제갈량과 관우, 장비는 제한된 역량으로 여전히 불안정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확장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손권


유비와 함께 조조가 구축한 운영체제의 확장을 저지한 손권이었지만, 적벽에서의 승리는 손권에게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형주 북부는 조조의 통제권이었고, 미개발지였던 형주 남부는 적벽대전 직후 유비가 확보하게 되면서, 손권은 자신과 함께 적벽대전에 참전한 지방세력들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형주, 특히 지역적 가치가 높은 형주 북부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장하고, 동시에 군벌로써 자신의 권위와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손권이었지만, 1년여의 공방전으로 얻은 것은 결국 강릉뿐이었습니다.


형주, 양주, 그리고 익주


적벽대전은 후한(後漢) 13주 체제에서 저개발지역, 외곽지역으로 구분되었던 남서부 지역, 즉 형주, 양주, 그리고 익주에 새로운 지위와 가능성을 부여한 사건이었습니다.


적벽대전 이후, 중원 경제권에 편입된 형주 북부의 개발은 가속화되었으며, 유비가 확보한 형주 남부에서는 제갈량의 주도하에 체계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손권은 적벽대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발판이 될 형주를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제갈량이 예상한대로는 아니었지만, 그가 설계한 융중대는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지도 12. 융중대(隆中對)




주7-5.

삼국지(三國志) 선주전(先主傳)에는 적벽대전 직후 강하에서 유기와 합류한 유비의 보병 전력이 "수만 명(步卒數萬人)"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제갈량전(諸葛亮傳)은 익주 원정 당시 유비가 이끈 병력을 "수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적벽대전 이후 유비 세력의 병력 운용 구조를 고려하면, 형주 남부의 안정 유지와 관우의 형주 북부 공세를 위해 상당 규모의 병력이 형주에 잔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주7-6에서 확인되듯 제갈량이 형주 남부 3군에 대한 행정·군사 감독권을 부여받은 점, 그리고 형주 수군의 핵심이었던 유기의 병력(주6-3, 약 1만 명)이 강하에 계속 주둔했던 점을 감안하면, 익주를 향해 출발한 원정군의 규모는 당시 유비 세력 전체 전력(추정 4만~5만 명)의 절반 내외인 약 2만~3만 명 규모로 추산됩니다.


주7-6.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따르면, 유비는 익주 원정길에 오르며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임명하고 형주 남부 3군(영릉, 계양, 장사)의 감독권을 맡겼습니다. 이는 당시 유비 세력이 확보한 영토, 즉 하드웨어에 비해 이를 관리할 시스템과 운영체계가 미흡했음을 시사합니다. 이후 제갈량은 형주 남부에세 조조의 정책과 유사한 조치들을 시행함으로써, 형주 남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유비의 익주원정을 보조함과 동시에 관우의 형주 북부 공세를 지원했습니다.


주7-7.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와 삼국지(三國志)의 호구 기록을 바탕으로 추산할 때,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중원 전역과 형주의 핵심 경제 거점인 양양(襄陽) 및 남양(南陽)을 장악하며 제국 전체 국력의 약 75~80%를 점유했습니다.